[소풍가는 교회] 하늘의 태양이 아닐지라도! 밤 하늘에 달과 별이 못될지라도!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를 비추는 작은 등불이 되게 하소서♡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에 되하여 생각해 보았습니까 인생은 그저 부모님의 의해 탄생하였고 이 세상에서 살다가 죽으면 끝이라 생각하십니까 그런데요 성경에서는 정확하고 확실하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보다 어려운 것은 승리 이후 흩어진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것입니다. 압살롬의 반역이 진압된 후, 압살롬의 편에 섰던 사람들과 다윗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불신과 두려움의 장벽이 생겼습니다. 이때 회복의 물꼬를 튼 것은 '은혜에 대한 기억'과 '먼저 내민 손'이었습니다. 압살롬 편에 섰던 백성들은 다윗이 과거에 자신들에게 베푼 은혜를 기억해
전쟁에서는 승리했지만, 다윗 왕은 아들인 압살롬을 잃은 슬픔에 잠겨 통곡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왕의 눈물 때문에 목숨 걸고 싸운 군사들은 죄인처럼 성 안으로 숨어 들어옵니다. 즉 리더의 슬픔이 공동체의 헌신을 무가치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때 다윗의 충신인 요압이 거칠지만 충성스러운 직언을 던집니다. "왕이여! 슬픔의 자리를 잊고 이제는 당신이 감당해야할
전쟁은 승리했고 반란은 진압되었습니다. 온 나라가 기뻐할 소식이지만, 다윗 왕에게는 세상이 무너지는 비보였습니다. 왜일까요? 다윗에게는 왕권의 회복보다 아들 압살롬의 생명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승전보를 전하러 달려온 아히마아스는 왕의 슬픔이 두려워 진실을 회피하지만, 뒤이어 온 구스 사람은 아들의 죽음을 그대로 전합니다. 그 순간 다윗은 무너져 내립니
에브라임 수풀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비극적인 전쟁이 시작됩니다. 다윗은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고 간청하지만, 전쟁의 승패는 인간의 칼이 아닌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었습니다. 칼에 죽은 자보다 수풀에 걸려 죽은 자가 더 많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친히 이 전쟁에 개입하셨음을 보여줍니다. 압살롬의 최후는 인생의 아이러니를 극명하게 보여줍니
요단강을 건너 마하나임에 도착한 다윗과 백성들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편안한 왕궁을 떠나 거친 광야에서 잠을 청해야 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메마른 땅에 하나님께서 '거대한 은혜의 식탁'을 차려주십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세 사람(소비, 마길, 바르실래)이 침상과 대야, 그리고 각종 음식을 싣고 찾아옵니다. 즉 하나님은 단지
하나님은 다윗을 위해 저주의 땅 바후림에도 '구원의 우물'과 '돕는 여인'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덕분에 다윗과 백성들은 요단강을 건너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빨리 건너라"는 성령의 음성에 즉각 순종하여 익숙하고 편안한 곳을 떠나는 '결단'이 그들을 살렸던 것입니다. 반면, 천재적인 지략가 아히도벨은 자신의 계략이 거절당하자 자존심을 견디지 못하고
압살롬의 회의실에서 두 개의 전략이 맞붙습니다. 아히도벨의 전략은 군사적으로 완벽했습니다. "오늘 밤 기습하여 다윗만 제거하자." 반면 후새의 전략은 화려한 허풍이었습니다. "압살롬이여, 대군을 모아 친히 나가 영웅이 되소서." 누가 봐도 아히도벨의 안이 정답이었지만, 결과는 후새의 승리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성경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다윗이 피눈물을 흘리며 떠난 왕궁에 반역자 압살롬과 배신자 아히도벨이 입성합니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에게 다윗의 후궁들을 범하라는 끔찍한 패륜을 제안합니다. 이는 부자 관계를 회복 불가능한 적으로 만들어 정치적 결속을 다지려는 악마적인 지혜였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소름돋는 것은 이 사건이 일어난 장소가 바로 다윗이 밧세바를 훔쳐보았던 그 왕궁 옥상이었던
맨발로 도망치는 다윗에게 시므이가 나타나 저주를 퍼붓고 돌을 던집니다. 한때 존경받던 왕이 "피를 흘린 자여, 꺼져라"는 모욕을 듣는 처참한 순간입니다. 부하 아비새는 분노하여 칼을 뽑으려 했지만, 다윗은 그를 막아섭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왜일까요? 맞습니다! 다윗은 시므이의 등 뒤에 계신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
맨발로 도망치던 다윗에게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의 종 시바가 엄청난 양의 식량을 싣고 나타납니다. 지친 다윗 일행에게 이것은 사막의 오아시스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 선물은 순수한 섬김이 아니라, 다윗의 환심을 사 주인의 재산을 가로채려는 치밀한 '투자'였습니다. 시바는 "므비보셋이 왕위를 노린다"는 결정적인 거짓말로 다윗을 속입니다. 이것은 아들에게 배신당해
맨발로 감람산을 오르며 울던 다윗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립니다. 최고의 지략가 아히도벨이 압살롬의 편에 섰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의 배신은 다윗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없었지만, 그럼에도 다윗은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그는 즉시 하늘을 향해 짧고 강력한 화살 기도를 쏘아 올립니다. "여호와여,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그리고 기도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왕궁을 버리고 맨발로 도망치는 다윗이었지만, 그의 영성은 오히려 가장 비참한 이 '하산'의 길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납니다. 왜일까요? 그는 자존심보다 백성의 생명을 선택했고, 아들과 싸우는 대신 자신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를 겸허히 수용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모든 것을 잃은 그에게 하나님은 이방인 '잇대'를 보내주셔서 위로하십니
압살롬은 치밀하게 반역을 준비합니다. 그는 매일 아침 성문 앞에 서서 왕인 다윗에게 재판을 받으러 오는 백성들을 가로막고, 거짓된 공감("네 말이 다 옳다")과 왕에 대한 비방("왕은 무능하다")으로 이간질하며 스스로 정의의 사도인 척,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훔쳤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반역의 장소인 헤브론으로 가기 위해 '예배(서원)'라는 거룩한
압살롬은 머리털이 무거울 만큼 아름다운 외모를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그 화려한 겉모습 속에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폭력성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요압의 보리밭에 불을 지르는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이루어진 5년 만의 부자 상봉. 그러나 그 자리엔 눈물도, 회개도, 진정한 용서도 없었습니다. 그저 의례적인 절과 '차가운 입맞
드고아 여인의 일침과 요압의 주선으로 압살롬은 3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를 맞아주지 않고 차가운 명령을 내립니다. "내 얼굴을 볼 수 없게 하라." 그러나 이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몸은 돌아왔으나 마음은 여전히 유배지에 둔 '반쪽짜리 용서'였습니다. "용서는 하지만 꼴도 보기 싫다"는 아버지의 냉대는 압살롬에게 징계보다 더 큰 상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과 '거리두기'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하늘과 땅의 그 무한한 거리를 좁히시고 우리 곁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으로만 계시지 않고, 상처 입기 쉬운 연약한 '육체'가 되신 것입니다. 왜일까요? 우리의 배고픔, 아픔, 슬픔을 글로 배우지 않고 온몸으로 겪으시며, 우리의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님은 이 땅의 화려한 '궁전'이 아닌, 아무 것도 없는 '빈 들'에 임했습니다. 그럼 오늘 우리의 마음은 세상의 것들로 가득 찬 '궁전'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만을 갈망하는 '빈 들'입니까? 이처럼 빈 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세례 요한은 우리에게 '왕의 대로'를 닦으라고 외칩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이, 왕이신 예수님이 오시
참회 명상
오늘 말씀은 칠흑 같은 인생의 어둠 속에 포기하고 주저앉아 있는 우리에게 소망의 '큰 빛'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그 소망의 큰 빛을 받는 대상은 어둠 속에 멈춰 선 자가 아니라, 어둠 속에서도 빛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어둠은 우리 힘으로 싸워 이길 수 없습니다. 아이가 빗자루로 어둠을 내쫓을 수 없듯이, 우리 또한 우리의 힘으로는 내 인생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