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풍가는 교회] 하늘의 태양이 아닐지라도! 밤 하늘에 달과 별이 못될지라도!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를 비추는 작은 등불이 되게 하소서♡
다윗은 자신의 간음죄를 덮으려던 시도가 실패하자, 가장 끔찍한 길을 선택합니다. 바로! 충신 우리아를 죽이기로 한 것입니다. 더욱 잔인한 것은, 그 살인 지시가 담긴 편지를 피해자인 우리아의 손에 들려 보냈다는 사실입니다. 왜일까요? 다윗은 우리아가 그 편지를 가는 도중에 읽지 않을만큼 충직한 부하라는 사실을 알고 이용하였던 것입니다. 죄는 이와 같이 인간
모든 전쟁에서 승리한 다윗이지만 그 승리의 정점에서 가장 끔찍한 패배가 시작됩니다.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 그는 마땅히 있어야 할 '사명의 자리인 전쟁터'를 떠나 안락한 '휴식의 자리인 예루살렘 왕궁'에 머물렀던 것입니다. 맞습니다! 영적 긴장이 풀리고 사명을 멈추는 바로 그 자리가 죄가 틈타는 자리였던 것입니다
다윗은 이웃 나라 암몬 왕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며 사절단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감사가 아닌 끔찍한 모욕과 전쟁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에도 선한 의도가 오해받고 비수가 되어 돌아오는 억울한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윗은 분노 대신 '덮어줌'을 선택합니다. 수치 당한 신하들을 조용히 쉬게 하며 그들의 상처가
모든 승리를 거둔 다윗 왕은 세상의 방식대로라면 왕권을 위협하는 사울의 후손들을 찾아 숙청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심판이 아닌 '은총(헤세드)'을 베풀기 위해 사울의 후손들을 찾았습니다. 왜일까요? 맞습니다. 요나단과 맺었던 '언약'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찾은 사람은 '로-드발'(소망 없는 땅)에 숨어 살던, '다리 저는'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7장)을 받은 다윗의 삶은 평화로운 안식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의 삶은 곧바로 사방의 적들과 맞서는 치열한 전쟁(8장)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은혜받은 자의 삶이 '나태'가 아니라, 거룩한 '책임'임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동서남북 모든 적을 물리치며 연전연승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비결을 단 하나로 요약합니다. "다윗
[새벽 묵상] 왕의 기도, 은혜에 압도된 자의 응답!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짓겠다는 다윗의 가장 선하고 위대한 계획을 들으신 하나님은 "아니, 그 일은 네가 할 일이 아니다"라고 거절하십니다. 이때 다윗의 반응은 실망하거나 따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기도했던 것입니다. 즉 다윗은 '내가 주를 위해 무엇을 하겠다'는 분주한 행위
모든 전쟁이 끝나고 안식을 얻은 다윗은 자신의 편안한 백향목 궁에서 초라한 장막에 계신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제가 주님을 위해 가장 위대한 성전을 짓겠습니다!"라고 결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밤에 찾아오셔서 단호히 거절하십니다. "니가 나를 위해?" 그리고는 더 위대한 반전을 선포하십니다. "나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너의 영원한 집을 지어
하나님의 언약궤가 들어오는 기쁨의 축제의 날, 다윗은 왕의 체면을 벗고 '거리'에서 백성들과 함께 땀 흘리며 춤춥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 미갈은 축제에 참여하지 않고, 안전하고 높은 '창문' 뒤에서 그를 멸시합니다. 그녀는 '관객'이었고, '판단자'였습니다. 미갈은 인간적인 '품위'를 중시했지만,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의 '낮아짐'을 선택했습니다. 다윗의 신
다윗은 3만 명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언약궤를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려 했습니다. 그의 동기는 순수했고 열심은 뜨거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치명적인 실수를 합니다. 즉 하나님의 방법인 레위인이 언약궤를 '어깨'에 메고 옮기는 대신, 화려하고 효율적인 '새 수레'로 옮기는 세상의 방법을 택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로 웃사가 죽음을 맞았던
왕이 되는 축복을 받자마자, '르바임 골짜기(거인들의 골짜기)'에 적들이 가득 찹니다. 즉 축복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영적 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경험을 의지하지 않고, 먼저 하나님께 엎드려 묻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올라가라" 명하셨고, 순종하자 그는 '바알 브라심(돌파하시는 주님)'의 승리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잠시 후, 똑같은
통일 왕국의 왕, 난공불락의 예루살렘 정복, 백향목 궁전, 그리고 자신의 뒤를 이을 수많은 아들들... 다윗의 인생은 축복의 정점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성경은 "다윗이... 처첩들을 더 두었으므로"(13절)라는 불길한 기록을 남깁니다. 그럼 그는 왜 하나님의 명령(신명기 17:17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 너를 위해 은금을 쌓지 말라!")
15년이 넘는 기나긴 기다림. 다윗은 자신의 왕국을 칼로 쟁취하지 않았습니다. 복수 대신 용서를 택하며 자신의 손을 깨끗하게 지켰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때가 되자, 하나님은 온 이스라엘 지파를 움직여 그를 왕으로 '초대'하게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리더는 세 가지 자격을 갖춥니다. 첫째, '우리는 왕의 골육'이라는 공감의 마음입니다. 그의 고난은 백성의
아브넬이 죽었다는 소식에, 왕인 이스보셋의 '손에 맥이 풀리고' 온 이스라엘은 공황에 빠집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리더십의 공백은 두 종류의 반응을 낳습니다. 하나는 이 혼란을 틈타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한 '기회'로 삼는 바아나와 레갑 같은 자들이고 또 하나는 이런 혼란 속에서도 '하나님의 공의'를 붙드는 다윗과 같은 자들입니다. 기회주의자인 바아나와
이스라엘 통일 직전, 요압의 비겁한 살인으로 국가는 다시 분열의 위기에 놓입니다. 이 절대 절명의 순간, 왕 다윗이 선택한 것은 칼이 아닌 '눈물'이었습니다. 다윗의 눈물은 악의 고리를 끊는 '진실한 애도'였습니다. 그는 살인자 요압을 포함한 온 백성과 함께 아브넬의 죽음을 애도함으로써, 복수의 확산을 막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눈물은 분열된 마음을 하
이스라엘의 통일이 눈앞에 있었습니다. 다윗은 숙적 아브넬과 평화의 언약을 맺고 그를 평안히 보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 이루어지려던 바로 그 순간! 다윗의 장수 요압이 등장합니다. 요압은 아브넬이 평화롭게 돌아갔다는 소식에 분노합니다. 그의 눈에는 아브넬이 평화의 사절이 아닌, 동생을 죽인 원수이자 교활한 스파이로만 보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울의 군대장관이었던 아브넬의 이름의 뜻은 "나의 아버지는 등불이시다"입니다. 이름만 보면, 하나님을 빛으로 삼아 살아가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이름과 정반대인 '어둠' 그 자체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왕을 배신하고, "이 땅이 누구의 것이니이까?"라고 물으며 스스로 자기가 이 땅의 주인인 것처럼 교만하게 행동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오늘 말씀은 세상이 부러워할 만한 다윗의 성공을 보여줍니다. 헤브론에서 여섯 명의 아들을 얻으며 그의 가문은 번성했고, 왕권은 안정되어 갔습니다. 이것은 분명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복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복의 '이중성'을 보라고 말합니다. 다윗의 강성함의 증거였던 그 아들들은, 훗날 왕권 다툼과 근친상간, 형제 살
하나님의 백성, 한 형제였던 유다와 이스라엘 군대가 기브온 못 가에서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눕니다. 어리석은 힘겨루기는 결국 24명의 젊은이가 서로의 옆구리에 칼을 꽂고 쓰러지는 비극으로 끝납니다. 사람들은 그곳을 '헬갓 핫수림', 곧 '날카로운 칼의 밭'이라 불렀습니다. 이 이름은 우리에게 무서운 영적 경고를 줍니다. 형제를 향한 미움과 다툼이 시작될 때,
사울이 죽고 왕좌가 비었습니다. 모든 상황이 다윗에게 유리하게 흘러 갑니다. 즉 지금이 다윗이 권력을 잡을 절호의 기회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군대를 움직이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엎드립니다. "어디로 가리이까?" 하나님은 정권을 잡을 수 있는 중심지 기브아가 아닌, 험준한 산악지대인 '헤브론'으로 가라 하십니다. 여기서 '헤브론'의 뜻은 '교제', '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을 잃은 슬픔을 '활 노래'라는 한 편의 시로 승화시킵니다. 왜 '활'이었을까요? 활은 사울을 죽음에 이르게 한 '고통의 무기'이자, 친구 요나단과의 우정을 떠올리게 하는 '추억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활(케쉐트)'의 더 깊은 의미를 알려줍니다. '케쉐트'는 '무지개'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무지개는 모든 것이 끝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