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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비 시해 - 여우사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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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비 시해 - 여우사냥

일제는 <여우사냥> 이라는 비밀작전을 벌였습니다. 조선의 침탈에 가장 방해되는 명성황후를 제거하고 대원군을 꼭두각시로 세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1895년 음력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새벽, 경복궁 안에 있는 건청궁의 옥호루에서 명성황후는 난입한 일본 낭인들의 손에 처참하게 살해당합니다. 시신마저 향원정의 녹원에서 불살라지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이른바 을미사변(명성황후시해사건)입니다. 이를 배후에서 지휘한 것은 일본 정부의 지시를 받은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였습니다.


▲ 명성황후 시해사건 관련자. 왼쪽부터 미우라 공사, 이토 히로부미 총리, 이노우에 전 공사

명성황후가 비참하고 굴욕적인 최후를 마쳤다는 것은 단지 일제 낭인의 손에 목숨을 잃었기때문만이 아닙니다. 한사람의 여성으로, 하나의 인간으로서 상상도 하기 힘든 끔찍한 만행을 당했기때문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에조(英臟) 보고서’라고 들어보셨나요. 명성황후 시해사건 직후 일제 낭인패 중 한 명이 작성해 일본 본국으로 비밀리에 보낸 보고서입니다. 에조 보고서는 사건 발생 71년 만인 1966년 일본의 역사학자 야마베 겐타로(山健太郞, 1905∼1977)에 의해 최초로 알려짐으로써 그 동안 소문으로만 돌던, 명성황후에 대한 일본인들의 '윤간(輪姦)'과 '시간(屍姦)'의 근거가 됐습니다.

그러나 이 문서는 그 존재만 알려졌을 뿐 전문(全文)이 국내에 입수되거나 공개된 적은 없었습니다. 그것을 2002년에 소설가 김진명씨가 이 문서의 전문을 찾아냈고 오마이뉴스 정지환 기자에게 전달함으로써, 무려 107년만에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이 기사는 당시 한일월드컵 열기와 함께 기존 언론에 의해 무시되어 큰 조명을 받지 못했습니다.)

조선 정부 내부(內部, 요즘의 내무부) 고문의 직책을 가지고 있던 이시즈카 에조(石塚英藏)는 명성황후 시해 다음날 ‘여우사냥’의 주모자인 미우라 공사 몰래 상관인 일본 정부의 법제국장관 스에마쓰 가네즈미(末松謙澄)에게 장문의 보고서를 보냈습니다.

이 보고서는 사건의 원인에서부터 실행자, 사후대책까지 충실히 기록됐고 미우라 공사의 책임과 처벌을 암시하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일본의 입장에서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조사하고 재판한 '우치다 보고서'나 '히로시마 법정기록' 등과 달리 사후에 은폐되고 조작됐다는 의심으로부터 벗어난 유일한 문서로 평가받습니다.

오마이뉴스에 따르면 에조는 "일인들이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할 당시 현장에 있던 20대의 젊은 낭인"이었습니다. 고문 직책은 당시 일본이 조선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던 때라 낭인들이 명목상 하나씩 얻고 있었던 것입니다.

김진명씨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에조 보고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명성황후가 시해 직전 즉 살아 있는 동안 능욕당하고 불태워지면서 죽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무리들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왕비(王妃)를 끌어내어 두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혔다(處刃傷). 나아가 왕비를 발가벗긴(裸體) 후 국부검사(局部檢査)(웃을(笑) 일이다. 또한 노할(怒) 일이다)를 하였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기름(油)을 부어 소실(燒失)시키는 등 차마 이를 글(筆)로 옮기기조차 어렵도다. 그 외에 궁내부 대신을 참혹한 방법으로 살해(殺害)했다.>

<스에마쓰 장관님, 정말로 이것을 쓰기는 괴로우나 건청궁 옥호루에서 민비를 시해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보고를 드리고자 합니다. 민비는 강제로 저고리가 벗겨져 가슴이 훤히 드러난 상태로 머리채를 잡혀 바닥에 쓰러졌습니다. 낭인 하나가 거센 발길로 민비의 가슴을 밟고 짓이기자 또 하나의 낭인이 민비의 가슴을 칼로 베었습니다. 일은 그후에 시작되었습니다. 왕세자를 불러 죽은 여인이 민비임을 확인한 낭인들은 모두 민비의 주위에 몰려 들었습니다. 그들은 조선의 가장 고귀한 여인을 앞에 두자 갑자기 숙연해졌습니다. 왕비를 시해했다는 기분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조선 제일의 미녀를 앞에 두어서였는지...낭인들은 민비의 하의를 벗겼습니다. 한 낭인이 발가벗겨진 왕비의 음부를...숫자를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몇몇 낭인이 결국은 바지를 벗고 성기를 꺼내 왕비의 희고 깨끗한 몸에...정액으로 얼룩진 조선 왕비의 시체를 앞에 놓고 낭인들은 대일본 만세를 불렀습니다...>

에조 보고서를 소개한 다른 글입니다.

<에조 보고서-서간용 두루 마리에 먹으로 씀(메이지 28년 10월 9일부)

이 사건의 실행자는 훈련대 이외에 수비병의 후원이 있었다. 다만 수비병외에 일본인 20명쯤이 있었다. 구마모토 현 출신자가 다수를 차지하여 그들 중에 신문기자 몇명 또한 의사, 상인도 있었다. 따라서 양장, 화장(일본옷)이 서로 섞여 있었다. 특히 무리들은 깊이 안으로 들어가 왕비를 이끌어내고 두 세군데 칼질을 저질러 (상처를 입히고나서) 나체로 하고 국부검사(말은 검사지만 실제로는 강간)를 하고 마지막으로 기름을 뿌려서 태워버렸다. 기타 궁내대신은 몹시 잔혹한 방법으로 살해했다고 한다. 위는 사관도 도와주기는 했지만 주로 병사 외 일본인들이 저지른 짓인 것 같다. 대략 세 시간 여를 소비하여 위막된 짓을 저지른후 위 일본인들은 단총 또는 도검을 손에 쥐고 유유히 광화문 (왕성정문)을 나가 군중 가운데를 뚫고나갔다. 그 때가 벌서 8시쯤이 지나고 왕성앞에는 사람으로 人山人海(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또 다른 자료입니다.

<먼저 낭인들이 20명 정도 궁에 쳐들어와서 고종을 무릎꿇게 만들고 이를 말리는 세자의 상투를 잡아 올려서 벽에다 던져버리고 발로 짓밟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명성황후를 발견하자 허리 와 배에 칼을 꽂은 후 시녀들의 가슴을 다 도려내고 명성황후의 옷을 벗겼다. 그리고 돌아가면서 20명이 강간을 했다. 살아있을 때도 하고 한 6명 째에 죽어있었는데도 계속했다. 명성황후는 시간과 윤간을 다 당했다. 그리고 그것을 뜯어 말리는 충신의 사지를 다 잘라버렸다. (이글의 작성자 에조는 하지 않았다.)..>

너무도 충격적입니다. 이 내용을 옮겨쓰는 제 손이 부들부들 떨립니다. 인간의 탈만 썼을뿐 저들 살인귀 앞에선 악마조차 고개를 돌릴 것입니다.

죽은 사람을 범하는 것을 시간(屍姦)이라고 합니다. 발가벗겨져 윤간(輪姦) 당하고 칼로 찔려 살해한 것도 모자라 시간(屍姦)의 악랄한 만행속에 온 몸이 불태워진 것입니다. 다름아닌 조선의 국모가 말입니다.

얼마전 MB가 일왕이 방한하고 싶거든 먼저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께 사죄부터 하라고 했습니다. 임기말년의 MB이지만 이 대목의 진정성을 의심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도 조선의 국모와 한 핏줄이니까요. 그역시 최소한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져야한다고 믿을 것이기에 말입니다.

그러자 일본 총리 노다는 되레 MB에게 사죄를 요구했지요. 저자들은 혹여 악귀의 사촌인가요? 사죄를 요구하다니요? 임진왜란, 정유재란에 걸쳐 한반도를 쑥대밭으로 만들며 코무덤, 귀무덤에 일본군성노예, 강제징용, 생체실험 등등 누대에 걸쳐 일본이 저지른 악행과 만행은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능가하고도 남습니다.

그중에서도 명성황후 참살(慘殺)은 인류역사상 최악의 잔혹한 살인과 시신모독일 것입니다. 일본은 지금이라도 구천을 헤매는 명성황후의 한서린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일본아~. 한번 상상이라도 해보거라. 조선의 부랑아들이 너희 나라 궁궐에 몰려가 왕을 무릎꿇리고 왕자의 머리끄댕이를 붙잡아 내동댕이 쳤다면? 피신한 왕비를 붙잡아 발가벗겨 돌아가며 윤간하고 칼로 찔러 잔혹하게 살해했다면? 그것도 모자라 동물도 할 수 없는 시신강간의 악행을 저지르고 석유를 뿌려 불태우며 ‘대한제국만세’를 외쳤다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겠느냐? 일본왕들이 대를 이어 석고대죄한들, 너희나라 국민들이 동시에 한반도를 향해 무릎꿇고 빈들 만고에 사무친 원한이 가실 수 있겠느냐?...”

▲ 백범 김구일제의 국모 살해는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적으로도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조선 전역에서는 왕비 살해의 원한을 갚자며 을미의병이 일어났고 국제적으로는 일본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백범 김구(金九)선생은 스물한살이던 1896년 황해도 진남포에서 조선인으로 위장한 칼 찬 일본인을 을미사변의 공범으로 판단, 폭행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국모인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함”이라고 일성을 토한후, 자신의 거처를 적은 포고문을 길거리 벽에 붙이고 집에서 좌정한후 체포되었습니다.

만일 명성황후에 가한 일본 낭인들의 참살 만행이 까발려졌다면 모든 조선백성이 백범 김구선생의 심정으로 봉기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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