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요, 탈출 직전의 마지막 수칙? 아니면 메뉴얼 중간에 교묘하게? 아니 왜, 몇 번 항목이 있다면 그 항목은 믿지마십시오 라는 문서 오염이 제일 유명하잖아요."
"대체로 그렇게 생각들 하지, 괴이는 우리가 탈출하는걸 원치 않는다고 생각하고, 우릴 다 죽이거나, 먹고싶을거라고 생각하니까.
그런데 생각해봐. 그런 공간에 우리를 끌고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어떻게 보면 우리의 상위개체가 굳이 죽이기 위해서, 먹기 위해서 끌고왔을까? 죽이는거라면 끌고오는 과정 중 죽이는게 오히려 더 쉬울거고, 먹을거라면 우리보다 살이 많고 맛있는 다른 개체를 타겟으로 삼았을거고... 그들의 목적은 그런 단순한게 아니야.
이게 뭔지 알아?"
그렇게 말하며 그는 작은 봉투를 들이밀었다. 그 안엔 하얀가루가 들어있다.
"이게 뭔데요? 밀가루에요? 마약이에요? 아니면.. 독약?"
"맞아. 독이야. 단순히 조금만 흡입하더라도 약간의 고통은 있지만 어쨌든 효과는 확실해서 빠른 시간안에 사람 하나정도는 죽일 수 있어."
"으엣! 이런걸 왜 들고다니는거에요? 선배 죽고싶어요? 자살희망자?"
"...우리가 배포하는 모든 메뉴얼 맨 첫 페이지에는 반드시 '죽을 수단'이 동봉돼. 꼭 지금 너가 들고있는 독약일 필요는 없지만, 간단하고 편리한 자살 수단을 함께 넣어두게 설계하는 편이야.
...그리고, 이 부분이 괴이가 가장 먼저 오염을 일으키는 부분이야.
우린 첫 페이지에 되게 솔직하게 그 사람이 처한 처지와 희박한 생존 가능성을 써놓고, 정신적으로 힘들거나 편한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면 독극물, 또는 동봉된 무언가를 사용하라고, 어찌보면 죽음을 권장하는 문장으로 메뉴얼을 시작해."
그는 다시 봉투를 품속에 넣으며 말을 잇는다.
"너라면 수십가지의 메뉴얼을, 솔직히 1시간도 안되는 짧은 시간동안 모두 외워서 다른 상황도 아닌 극한 상황에서 그 메뉴얼을 제대로 기억하고, 올바른 행동을, 수십가지나 하고, 임기응변도 어느정도 필요하고, 그걸 전부 성공하더라도 마지막에 실수 한 번이라도 하면 바로 고통스럽게 죽어버리는, 생존률이 1% 미만인 곳에 떨어졌다고 쳤을 때, 아무리 인간의 목숨이 소중하네 어떠네해도, 포기하고 싶지 않겠냐?
그래서 우리는 탈출이나 생존이라는 헛된 희망으로 고통스럽게 살리기보단, 현실을 보여주어 편안한 죽음에 중점을 두는거야."
그는 말을 이으며 품속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서 문다.
"후.. 그런데, 아까 말했잖아. 괴이들은 굳이 인간을 살려서 데려와놓는다고. 그들의 목적은 우리를 죽이거나, 먹는게 아니야.
괴이들의 흥미는 인간의 '반응' 에 있어. 우리처럼 발버둥 치며 보이는 우리들의 감정과 몸짓을 보고, 발악하는걸 보며 만족감을 느끼는 모양이야.
그 과정 중 사람마다 각각 다른 반응, 다른 감정을 느끼는걸 즐기는거야.
어릴 때 개미정도는 죽여봤지? 붙잡아서 돋보기로 태우거나, 흙을 파서 미로에 가두고 그 안에 물붓고.. 먹는 애들도 있었지, 그런 애들중 몇몇은 커서 고양이를 괴롭히잖아? 왜? 고양이는 개미와 다르게 감정을 보여주고 더 격한 반응을 보여주니까. 괴이에겐 우리가 그런 개미나 고양이 그 이상의 무언가인거야."
"그런 괴이들에게.. 가장 거슬리는 상황은.. 어떻게든 살려서 그런 이공간에 넣어놨는데.. 그 사람이 아무반응도 안보여주고, 포기해버리고, 죽어버리는거겠네요..?"
"...그런가보더라. 그래서 문서오염이 진행되면, 대체로 맨 첫 부분이 가장 먼저 오염돼. 이 독약처럼, 죽을 수 있는 수단 가장 먼저 없애고, 우리가 작성한 자살권장글을, 희망을 갖고 정신차리라는둥, 메뉴얼대로만 하면 살아갈 수있다는둥, 그 자리에 데려다놓은 인간을 어떻게든 포기하게 하지 않으려고 아주 인간 찬가를 도배해놓더라고."
어느새 그가 문 담배가 다 타버렸다. 그는 주섬주섬 담배꽁초를 비벼끄더니, 재떨이에 툭, 하고 던지고선 한 대 더 꺼내서 물고 피운다.
"더 웃긴건, 이녀석들이 오히려 우리보다 납치된 사람들을 살리고싶어한다는거야. 정확히는.. 자기들이 생각하고 규정한 난이도가 있는데, 딱 그 정도를 유지하고 싶어하는거같아.
우리는 명확히 파악하지 못해서 불완전하게 써놓은 메뉴얼을, 오히려 괴이들이 더 정확하게 탈출법을 적어둘 때가 있어. 가짜 정보가 아니라, 진짜 정보로. 그걸 보고서는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물론 우리가 메뉴얼을 세세하게 적으면, 또 그건 살짝 모호하게 수정해놓기도 하더라. 물론 우리가 문서오염이라고 하면 대체로 떠올리게되는, 대놓고 티나게 앞뒤가 안맞는 규칙을 써두거나, 대놓고 오염 되었다는 티를 내기도해. 가장 대표적인게 아까 너가 말한, 3번수칙은 없습니다, 믿지마십시오 같은거. 오히려 그런걸 대놓고 문서오염처럼 써놔서, 실제로 교묘하게 오염된 부분은 의심하지 않고 넘어가게돼. 웃기고 똑똑한 놈들이야. 결국엔.. 이런것도 만들어버렸어."
그는 뒤에 매고있던 검정색 가방에서 서류철 하나를 꺼내서 건넨다. ♧♧마트 탈출수칙.. ♧♧마트? 기억에 없다. 이런 곳이 있던가? 이 탈출 수칙은 우리가 작성한건가?
"선배.. 이건...."
"이런 곳이 있나싶지? 나도 처음봤다. 너 생각 그대로, 이 메뉴얼도 우리가 작성한게 아니야. 근데 얼마 전, 한 생존자가 이 메뉴얼을 들고 우리를 찾아왔다.
괴이는 이미 우리가 모르는 곳에 지들 놀이터를 만들고, 메뉴얼도 지들 멋대로 만드는 정도로 학습했어. 우리는 이제 고작해야 괴이들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는 정도겠지.. 나 먼저 간다."
그는 담배를 다 태우고 일어났다. 재떨이엔 반쯤 타다 남은 꽁초들이 눌려있다.
그가 준 서류철의 탈출수칙을 멍하게 들여다보다, 문득 한 문장에 눈이 꽂혔다.
" - 반드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
- 선택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