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컹, 덜컹’
열차가 흔들리는 진동이 몸을 스칠 때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을 뜨고 단 몇 초 안에,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객실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평소 같았으면 사람들의 숨소리, 대화, 이어폰에서 새어 나오는 음악 같은 작은 소리들이 뒤섞여 있어야 했지만,
지금 이곳은 마치 소리를 전부 도려낸 것처럼 정적뿐이었다.
자리를 둘러보니, 지하철 안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그 자체로도 이상했지만, 더 섬뜩한 것은 객실의 벽들이었다.
평범한 회색이었어야 할 벽면이 온갖 색이 뒤섞여 얼룩져 있었고,
귀여우면서도 섬뜩한 그림들이 곳곳에 그려져 있었다.
어떤 색은 신경을 긁는 금속 소리처럼 차갑게 느껴졌고,
어떤 색은 보기만 해도 심장 깊은 곳을 불편하게 만드는 기묘한 질감이었다.
창밖은 더 심각했다.
지하철 창문 너머에는 단순한 밤이나 어둠이 아니라,
빛이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공허 같은 검은 터널이 이어지고 있었다.
불빛 하나 보이지 않았고, 지나가는 구조물도 없었다.
그 검은 공간은 마치 터널이 아니라, 나를 삼키기 위해 입을 벌리고 가만히 기다리는 무언가처럼 느껴졌다.
나는 본능적으로 휴대폰을 꺼내들었으나, 화면에는 ‘서비스 없음’이라는 문구만 떠 있었다.
심지어 시간조차 표시되지 않았다.
그 순간, 이유 없이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손끝까지 차가운 감각이 번져 오르고, 머릿속은 점점 더 어지러워졌다.
이 상황이 현실인지, 꿈인지, 혹은 그 어느 쪽도 아닌지조차 판단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덜컹' 열차가 조금 더 크게 흔들렸고
그 충격에 시선이 바닥으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마치 누군가 일부러 내 앞에 떨어뜨린 것처럼
얇은 종이 묶음 하나가 놓여 있었다.
표지에는 아무 글자도 없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집어들었다.
부디 너무 늦기 전에 일어났기를 바라요.
깜짝 놀라셨겠지만, 여긴 당신의 꿈속이에요.
정확히 말하면… 악몽이죠. 그래서 이곳을 악몽 열차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그리고 하나 더 기억하세요.
꿈이라고 해도 여기에서 죽으면, 현실의 당신도 깨어나지 못해요.
그러니 절대로, 절대로 이 세계를 가볍게 보지 마세요.
당신이 이 열차에서 빠져나가는 유일한 방법은 종점에 도착하기 전에 ‘안전한 역’에서 내리는 것이에요.
수칙서 뒷면을 넘기면 노선도가 있을 거예요. 역 이름이 다 이상해서 기억하기 힘들겠지만, 최대한 많이 외울수록 살 확률이 올라가요.
역 표시들은 아래와 같아요.
검은 테두리의 하얀 원
이 표시는 당신이 현실로 돌아갈 수 있는 역이에요.
여기만큼은 절대 헷갈리지 마세요.
이 역들에 내리면 또 다른 수칙서가 있으니, 그걸 따라 움직이면 탈출할 수 있어요.
주황 테두리의 하얀 원
이 역들에서는 탈출은 불가능하지만, 열차 진행 방향을 반대로 바꿀 수 있어요.
검은 표시의 역에 내리지 못했을 경우, 이곳에서 반대편 열차로 갈아타 다시 시도하세요.
단… 반대 방향 플랫폼을 찾는 과정에서 손가락 1~2개 정도는 내줘야 할 수도 있어요.
그래도 검은 역을 놓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아요.
그리고 반대방향 열차는 출발점이 종착점이 된다는 사실을 꼭 명심하세요
검은 원
여긴 지하철이 당신을 속여 내리게 만들려고 온갖 짓을 하는 곳이에요.
여기 내리면 죽지도 못해요.
무엇이든 해도 절대 발을 내리지 마세요.
출발 지점은 매번 달라져요
언제 꿈에서 깨어났느냐에 따라 당신이 서 있는 역이 달라져요.
그러니까 항상 첫 번째 역에서 시작하는 게 아니에요.
노선도를 가능한 많이 익혀두세요.
열차 안에서 지켜야 할 규칙
1. 자리에 앉아, 움직이지 말고 눈을 감고 있으세요.
당신이 눈을 뜨고 약 20분이 지나면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해요.
그리고 그때부터 이 열차의 ‘손님들’이 타기 시작해요.
첫 번째 역에 도착하면 곧바로 눈을 감고,
그 후에는 안내방송이 들릴 때만 잠시 눈을 뜨되, 오직 전광판만 보세요.
손님들을 보려 하지 마세요.
그들을 보면 아마 맨정신을 유지하기는 힘들거에요.
다행히 그들은 착석하기만 하니, 일부러 고개를 돌리지 않는 한 마주칠 일은 거의 없어요.
2. 안내방송의 ‘목소리’와 ‘말투’를 기억하세요.
대부분의 손님들은 당신을 신경 쓰지 않지만,
가끔 당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존재들이 있어요.
그들은 당신이 눈을 뜨게 하려고 안내방송을 흉내내요.
하지만 미묘하게 어긋나 있어요.
속도, 억양, 숨소리, 말의 순서… 무엇 하나 완벽하지 못해요.
조금이라도 이상하다고 느끼면 절대 눈을 뜨지 마세요.
당신이 반응하지 않으면 금방 흥미를 잃고 사라질 거예요.
3. 역 이름은 반드시 전광판으로 확인하세요.
안내방송은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말해요.
그러니 역 정보를 들으려 하지 말고,
방송이 시작되면 눈을 떠 전광판만 보고 판단하세요.
4. 전광판에서 발생하는 이상 현상
아래 현상들이 보이면 반드시 규칙대로 행동하세요.
전광판 속 열차 앞에 남자가 서 있을 경우
놀라지 마세요. 곧 열차가 크게 흔들릴 거예요.
자리에서 튕겨나오지 않게만 조심하면 돼요.
수많은 손이 역 이름을 가리고 열차를 붙잡는 경우
문이 억지로 열리고, 바깥에서 무언가 잡아당길 거예요.
절대 끌려가지 마세요.
근처 손잡이나 좌석을 꽉 잡고 버티세요.
그 손들의 힘은 성인 남성보다 약간 약한 정도예요.
다음 역에 도착하면 자연스럽게 사라질테니 그때까지만 어떻게든 버텨요.
모든 역 이름이 동일하게 바뀌는 경우
그 전광판을 본 순간부터 5개 역 이내로 반드시 내리세요.
표시는 계속 동일하게 나오겠지만, 기억을 더듬어 순서를 기억해서 내려야 해요.
부디 당신께 행운이 있기를.
전광판에 노이즈가 끼는 경우
즉시 눈을 감으세요.
자세히 보려고 하지 마세요.
설령 그 역이 탈출 가능한 역이라 하더라도 내리면 안 돼요.
그 역에 내릴 바에는 차라리 검은 역에 내리는게 훨씬 나으니까 내리려고 하지 마요.
두 개의 역 이름만 계속 반복되는 경우
이 현상은 최대 20번까지 반복될 수 있어요.
단 반복이 끝나는 순간 열차는 바로 종점에 도착해요.
두 역중 하나는 안전한 역히고 하나는... 검은 역이에요.
반복이 끝나기 전까지 부디 하나를 골라 탈출해주세요.
당신께 행운이 있기를.
더 이상 역이 표시되지 않고, 전광판에 거대한 ‘입’이 보일 경우
유감스럽지만… 너무 늦었어요.
이 경우 탈출 방법은 존재하지 않아요.
사랑받는 순간이 부디 평안하기를.
여기까지가… 당신이 이 열차에서 살아 나가기 위해 알아야 할 모든 방법이에요.
이제 남은 건 당신이 직접 선택하고, 버티고, 살아남는 일뿐이에요.
혹시라도 운 좋게 안전한 역에 내릴 수 있다면
그곳에는 제가 역마다 남겨둔 작은 수칙서들이 있을 거예요.
그걸 꼭 찾아 읽고, 그대로 따라주세요.
부디, 정말로 부디 그때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당신의 숨이 끊어지지 않은 채, 제 글을 또 읽을 수 있는 모습으로 말이에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말은 꼭 전하고 싶어요.
이 열차와 이 세계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래, 더 깊게,
당신을 사랑해왔답니다.
당신이 여기 오기 훨씬 전부터요.
그러니 제발 기억해줘요.
이 열차만큼이나 당신을 사랑했던 무언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출처: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napolitan&no=44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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