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풍가는 교회] 하늘의 태양이 아닐지라도! 밤 하늘에 달과 별이 못될지라도!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를 비추는 작은 등불이 되게 하소서♡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을 위해'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즉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는 뱀의 말에 속아서 먹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하나님처럼 된 것이 아닌 정반대로 나타났습니다. 지상낙원이었던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으며 등골에 땀이 흐를 정도로 고생해야만 겨우 먹을 것을 얻을 정도로 비참한 신세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원인이 바로! "자기들
'기회주의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또 다른 표현으로는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럼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이런 사람은 모든 결정의 기준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즉 무슨 결정을 내리든지 "자기에게 유리한가? 불리한가?"를 따져서 유리하면 받아들이고 불리하면 거부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일지라도!
인생은 늘 선택의 갈림길에 서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한 양심을 따라 좁은 길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내 마음의 유익과 욕심을 따라 넓은 길을 택할 것인가? 우리의 신앙도 이처럼 매순간 결단 해야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결단인가? 내가 만족하는 결단인가? 하나님의 음성에 따라 결단하는가? 사람의 소리에 귀기울이는가? 예수님을 죽이려는 군중들의
우상은 자기를 위하여,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자기의 풍성한 삶을 위하여 자기 스스로 만든 형상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하나님일지라도 자기를 위해 섬기면 하나님조차도 우상으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왜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기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사람들의 행동하는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즉
'실패'의 뜻은 '끝났어'가 아니라 '다시 시작하자'입니다. '자살'의 뜻은 '죽자'가 아니라 '살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삶의 방법'인 것입니다. 누가 나를 '욕'했는데 나는 그를 '축복'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복수의 방법'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고 이 때가 바로! 예수님이 실패의 자리에 있는 우리에게 '다시 시작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영향력 있는 사람이나 사건에 의해 좌우되지 않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에 의해 모든 일들이 계획되고 추진되고 성취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고 성장하고 끝을 맺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실 수 있도록 당신이 기뻐하시는 삶을
'회복'의 사전적 의미는 '원래의 좋은 상태로 되돌리거나 원래의 상태를 되찾음'이란 의미입니다. 예수님 이 땅에 오신 이유도 하나님께서 창조한 모든 것을 원래대로 회복시키시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불순종과 교만의 죄로 인해 무너졌던 하나님과의 관계! 이기적인 마음으로 인해 깨어졌던 지체들과의 관계를 다시 원상태로 돌리는 것, 이것이 '회복'이며, '
삶의 목적과 정체성을 잊고 사는 사람들은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일까요? 그들은 자신이 삶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막연한 두려움을 안고 어쩔 수 없이 그 길을 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정체성을 잊고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심판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나 우리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과 함께 동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을 생각하게 되어 있고,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추구하게 되어있고, 자기가 추구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모든 힘과 노력을 다! 쏟아 붓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블레셋 사람들을 이용하여 여인만 쳐다보고 자신의 정욕만을 채웠던 삼손의 두 눈을 뽑아버리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신 이유는 삼손을 사랑하시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기쁨은 자기의 욕심이 채워지고, 육적인 욕구가 성취되었을 때 오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당신의 사랑이 우리를 통해 이 땅에 이루어졌을 때 얻는 영원한 기쁨인 것입니다. 즉 우리는 끝없는 욕망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의 성취에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적으로 더 큰 성취를 얻고자 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기쁨
하나님은 우리를 행복한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행복한 날보다 그렇지 않은 날이 더 많다고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행복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이란 흔히 기쁨, 희열, 환희, 성공, 축복 등의 긍정적인 감정들이 우리의 삶에서 계속 이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한 평생 하나님을 곁에 두고도 진리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 채 살다가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합니다. 이것은 마치 숟가락이 맛있는 음식 맛을 모르고 한 평생을 아무런 의미없는 시간만을 보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주님을 만나는 아주 짧은 순간에도 자신의 모든 인생을 다해서, 이 땅에서 하나님이 주신 삶을 살아내다가 천
전쟁에서 아군과 적군이 전투를 벌여서 아군이 어떤 중요한 고지를 점령하였습니다. 그럼 그걸로 끝일까요? 아닙니다! 적군은 빼앗긴 그 고지를 되찾기 위해 계속해서 아군을 공격할 것입니다. 그럼 아군은 어떻게 해야할까요?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만반의 준비를 해야할 것입니다. 언제까지? 바로! 전쟁이 끝이 날 때까지!!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 살 동안
베드로전서 5장 8절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리를 삼키기 위하여 두루 다닌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즉 우리의 원수인 마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를 멸망시키려 한다는 것입니다. 즉 마귀는 하나님으로 인해 지옥에 떨어질 그날까지 한 명의 영혼이라도 함께 데려가려고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하나
우리는 세상을 사랑해서 세상과 더 가까워지려 하지만 세상은 그런 우리를 이용만 하고 마지막에는 우리를 배반하고 내팽개칠 것입니다. 우리는 탕자의 비유를 통하여 이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탕자는 세상을 사랑해서 아버지를 버리고 세상으로 갔지만, 세상은 그런 탕자를 버리고 탕자에게 아무런 관심을 주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굶어 죽어가는 탕자에게 돼지가
애굽에서의 포로생활의 고통과 광야 생활의 고난을 겪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한 것은 풍요로운 삶이었습니다. 즉 신앙보다는 물질의 풍요로움을 더 원했던 것입니다. 왜일까요? 그러면 행복해 질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버리고 물질을 택한 그들의 삶은 죽음보다 더 힘들었습니다. 하나님을 버리면 기쁨도 평안도 사라질 줄 몰랐던 것입니다. 즉 진정한 행복
성령의 은사(달란트, 재능, 능력)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즉 우리의 뜻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으로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어떤 방법이나 노력으로도 가질 수가 없는 것이 바로 성령의 은사인 것입니다. 그럼 어떤 사람에게 성령의 은사를 주시는 것일까요? 1. 개인과 그 개인이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인생의 목표이자 비전이라고 말합니다. 그럼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까요? 그들과 똑같이 살아야 할까요? 성경은 위와 같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사는 삶을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멸망이라고 말씀합
'엔학고레'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뜻은 '부르짖는 자의 샘물'이라는 의미입니다. 삼손이 블레셋 사람 천 명을 나귀 턱뼈로 죽이고 목이 말라 지쳐 있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어 얻은 샘물이 바로 '엔학고레'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삼손을 위해 '미리' 물을 준비하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왜 하나님은 삼손이 부르짖을 때까지 기다렸다 주신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이루어 가심에 있어 결코 우리의 계획이나 우리의 노력이나 우리의 열정에 의존하지 않으십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지 열심히 해야한다고 우리 자신을 부추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해야할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전히 쓰실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 드리는 일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