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야구 원조는 LG이광환 감독이 아니고
실제로 해태 타이거즈 김응룡감독이었다.
"스프링캠프때 가장 움직임이 좋은 선수를
주전으로 쓴다(이하 김종모 말)"
"부상당하지 않으면 주전1년 보장한다."
스프링캠프에서 주전으로 발탁되지 못하면
아무리 잘해도 대타다.
김응룡감독은 모든 선수를 야구실력으로
공평하게 대우했다.
단, 선동열은 예외였다(김성한 말)
팀훈련은 1시간반에서 길어야 두시간,
나머지는 개인 훈련이다.
김응룡감독의 이런 선언을 듣고 주전에 들기
위해 개인훈련을 게을리할 선수가 없었다.
자율야구는 그야말로 주전 쟁취위한 정말 혹독한
무한생존게임이었다.
타이거즈는 1982년 첫해 빨간 장갑의 마술사
김동엽감독이 15명 선수면 충분하다고 했다.
주5일 경기, 연간 80경기하는데 말이 안되는 선수
숫자였다.
투수가 총5명.
김용남 신태중 강만식 이상윤 방수원
타팀들은 선수가 25~30명 수준이었다
1982년 11월 김동엽감독에 이어 국가대표감독
출신 김응룡감독이 부임하면서
타이거즈야구는 완전히 달라졌다.
김동엽감독은 주입식 야구,
특히 런닝을 엄청시켰다.
김응룡감독은 야구는 스스로 자율적으로 하되,
결과에 반드시 책임이 따랐다.
시즌중 김응룡감독은 작전싸인을 거의 안냈다.
그러나 한국시리즈 진출하면 김응룡감독이
틀어쥐고 직접 싸인내면서 진두지휘해
승리했다.
시즌도중 김감독이 싸인을 안내니 타팀들은
김응룡감독의 속내를 파악할 수가 없었고
한국시리즈 나가면 김응룡감독한테 판판히
깨졌다(해태타이거즈 8년출입한 홍윤표기자)
김응룡감독은 부임해보니 은퇴후 남은 선수가
고작 12명,
부임직전 실업팀 한일은행야구단도 선수가
40명이었다.
필요선수 20여명을 확충했다.
그제서야 짜임새가 생겼다
1983년 창단2년차,
해태타이거즈는 전반기 우승,
김동엽감독의 MBC청룡(현 LG트원스)가 후반기
우승.
한국시리즈에서 해태가 창단 첫 우승.
그리고 우승 그것,
별거아니리고 모두가 자만했다.
84~85 2년간 침묵~~~~
86년 한국시리즈에서 국가대표급 선수진의
삼성과 붙어 한국시리즈 두번째 우승.
해태 타이거즈 왕조 시작이었다.
김종모의 얘기다.
1982년 입단후 첫해 타율 0.291.
사장실에서 연봉 재계약 협상하는데
외야수는 3할을 쳐야 선수자격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사장왈, 내년에 3할5푼치면 해달라는 것
다 해주겠다고 약속.
김종모는 진짜해주시는 거냐 ?
되묻고 그러면 호기롭게 3할5푼 치겠습니다.
사실 3할5푼은 리딩히터나 치는 기록이었다
김종모는 거짓말같이 1983년 정확히 타율
3할5푼(당시 팀에서 타율관리 받던 장효조와 달리, 김응룡감독은 타율관리 전혀 안해줘 마지막 경기,
마지막 타석까지 임한 성적이다)을 쳤고,
연봉협상차 사장실에 들어갔다.
당시는 연봉 인상 상한 25%가 있어서
아무리 잘해도 25%룰을 지켜야 했다
사장이 김종모에게 원하는 게 뭐냐 ?
연봉상한이 있으니 보너스를 주겠다.
김종모는 보너스 천만원(당시 주공 아파트
한채값 천만원)을 요구했다.
사장은 해태는 사실 돈이 없지 않냐 ? 면서
보너스 400만원을 제시했고 김종모는
수락했다.
단, 보너스 제공사실은 일체 비밀로 하기로
하고.
김성한도 김종모 보너스 수령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등등
지금 기아타이거즈 문제점과 해법은 유튜브
전설의 타이거즈에 다 있다.
기아관계자들이 진심 기아타이거즈 부활을
원한다면
전설의 타이거즈 김종모, 김성한 편 시청하길
바란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팬들은 타이거즈 역사를 기억하는데
기아 관계자들은 타이거즈 역사를 모르기에
우승후 7~8년 암흑기를 반복한다.
자율야구,
제목만 따라하지 말고,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고 따라했으면
팀이 이 지경 안됐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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