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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괴담회
(약스압) 조선시대 아동 발목 절단 미제사건 정리글

 

출처 : https://theqoo.net/square/2053782939



전에 올라왔던 카드뉴스 있는게 너무 요약되어서 왜곡될까봐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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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28년 2월 16일. 6살 정도로 추정되는 여자아이가 용산강 무녀의 집 뒤에서 발목이 잘린 채로 발견되었음.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이는 죽지 않았고 '나를 업고 가면 내 발을 자른 집을 가르쳐줄 수 있다'라고 말함

 

그리고 왕에게 보고를 올린 한성부에서는 '아이를 심문하면 늦어버리니 아이를 현장에 데리고 가서 빠르게 용의자를 체포하자'고 의견을 올렸고

 

중종은 '아이를 치료하지 않으면 죽을 것이니 신중히 간호하여 죽지 않게 하라'라고 명령을 내림. 

 

이후 포도부장을 통해 사건을 수사하라는 지시도 내림.

 

 

 

 

 

다음 날 한성부에서 올라온 보고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는데

 

 

발목이 잘린 아이의 이름은 개춘이라 하고 최초 발견자와 발견장소는 김귀성이라는 사람의 집 앞.

 

김귀성은 발이 잘린 개춘을 발견한 뒤 상황을 묻자 아이는 '누군가가 칼로 발목을 자르며 "죽어라, 죽어라" 했다' 라고 대답했다.

 

그것을 듣고 김귀성이 한성부에 신고하였던 것이었고 용의자로는 노비인 한덕이 지목되었다.

 

 

 

 

 

 

그리하여 한덕을 추문한 결과 피해자인 김개춘에 대한 사연이 드러남.

 

한덕은 주인의 집을 왕래하다가 어느날 동상이 걸리고 몸이 아픈 아이를 발견해 데리고 와 보살펴주었는데,

 

주인이 더러운 아이를 데려왔다며 꾸짖자 한덕은 아이를 다시 내쫒게 되었음. (1번째)

 

이후 이웃 중 다른 노비가 아이를 다시 데려갔다가 다시 내쫒았고 (2번째)

 

또 다른 사람이 이 버려진 아이를 다시 데려갔다는 것이었다.(3번째)

 

 

 

 

3번이나 버려진 아이에 대한 사연은 기구하지만 정작 발이 잘린 상황에 대해서는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생모라고 자처하는 중덕이라는 여성이 나타나

 

'이 아이는 옥가이다. 지난해 9월 29일에 잃어버렸는데, 이달 17일 발이 잘린 아이를 업고 가더라는 말을 듣고 우리가 쫓아 가보니 정말 옥가이였다.' 

 

라고 증언한다.

 

 

 

 

일단 생모가 나타난 시점에서 중종은

 

'이 아이의 두 발을 자른 것은 비록 죽이지 않았어도 마음은 죽인 것과 다름이 없다. 형조에게 추문하게 해야 하지만, 형조에서 일이 많아 자세히 처리하지 못할듯하니 

 

의금부에게 추문하게 하라. 지금 잡아온 자는 금부에 가두고, 이 아이는 생모라고 자청한 자에게 보내도록 허락하라.'

 

라고 지시를 내림.

 

 

 

하지만 이에 의심을 품은 신하들이 지적을 올렸는데,

 

'아이를 생모에게 보내라고 하셨는데, 중덕과 한덕이 사는 집의 거리가 멀지 않은데도 한덕에게 거두어진 아이의 소재를 그동안 몰랐다는 것은 수상하다. 또한 중덕이 생모가 확실하다는 증거가 없다.

 

 

 

이렇게 말하자 중종도 아래처럼 말하고 명령을 다시내림.

 

'아이를 생모에게 보내라고 한것은 어미에게 성심으로 간호받으면 살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인데,

 

어미가 어미인지 알지 알지 못하니 한덕과 중덕을 일단 모두 가두고 아이는 한덕의 주인이었던 김귀성의 집으로 보내 간호하여 죽지 않게 하라'

 

 

 

 

 

 

이 시점에서 피해자인 아이(개춘=옥가이)는 김귀성의 집에 있고 용의자로 의심되는 한덕과 중덕은 감옥에 있는 상황.

 

직후 의금부에서 보고가 새로이 올라오는데,

 

'아이가 처음엔 부상탓에 미욱하고 언어가 착란되어 그 증언을 믿기 어려웠는데, 

자세히 증언을 들어보니 그 두서가 있고 선후를 잃지 않아 쉽게 지나치기 어렵다.

그러니 아이를 다시 데리고 와서 자세히 묻게 하는 게 좋겠다'

 

 

 

역시 아이가 지목한 범인은 처음부터 용의자였던 한덕이었고,

 

이에 중종은 여자아이가 용의자로 지목한 한덕이 범인이 맞을 거라고 확신을 가짐.

 

'여자아이가 무슨 사사로운 감정이 있어서 그런 말을 했겠는가. 정말 한덕이 자른 것이기에 그렇게 증언한 것이다'

 

 

라며 6살짜리 아이의 증언을 신뢰함과 동시에 

 

'날이 추워 아이를 움직이게 하면 상처가 덧나 죽을 수 있으니 무리하지 마라'는 명을 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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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모라 자칭하는 중덕은 아이를 지난해 9월에 잃어버렸다고 하였다. 

 

그런데 한덕은 1월 10일에 주웠다가, 주인의 꾸지름으로 다음날에 버렸다고 답한다

 

그 사이의 기간이 5개월이나 되고 언제 발이 잘렸는지도 애매모호하다.

 

 

 

 

 

이후 한덕을 심문하여 아이를 데려갔던 사람들의 명단과 증언이 정리되는데

 

 

한덕 : 1월 10일에 길에 버려진 아이를 보고 주인집으로 데리고 왔더니 주인은 꾸짖었으므로 곧 버렸다. 그런데 대궐에서 쫓겨나 이웃에 사는 수은이란 사람이 데리고 갔고, 그 뒤에는 손금이 데리고 갔다

 

​수은 : 정월에 노비 영대가 여자아이 하나를 업고 왔는데 두 발이 동상에 걸렸고 형체도 더러워 영대에게 곧 버리라고 했다

 

손금 : 정월에 여자아이가 두 발이 동상에 걸려 검게 부어오른 채 울고 있으므로 주인집에 데리고 왔다. 그러나 주인이 꾸짖으므로 곧 버렸는데 그 뒤 무녀 귀덕이 데리고 갔다

 

귀덕 : 1월 27일 어린아이가 두 발이 동상에 걸려 있으므로 집에 데리고 왔는데 2월 5일에 발 하나가 동상으로 빠졌고 2월 8일에는 또 다른 발이 동상으로 빠졌다. 자질금과 을비 등이 이것을 보았다"

 

​자질금 : 무녀 귀덕이 과연 아이를 데리고 와 살렸는데 그때는 두 발이 완전했으며 동상으로 빠졌을 때는 보지 못했다

을비 : 1월 26-27일쯤 귀덕이 두 발이 동상에 걸린 아이를 살리는 것은 보았지만 발이 빠졌을 때는 보지 못했다

 

 

 

 

 

이후 아이의 증언도 명확히 정리되는데

한덕을 데리고 아이에게 가서 '누가 네 발을 잘랐는가.' 하니 아이는 '한덕이다' 하였고

한덕과 귀덕을 불러놓고 다시 '어느 사람이 네 발을 잘랐는가.' 하고 물으니 아이는 한덕을 가리켰다.

무엇으로 잘랐는가. 하고 물으니 '칼이다.' 하였고 

어디에서 잘랐는가. 하니 '방안에서 잘랐다. 하며,

언제 잘랐는가 물으니 '낮에 잘랐다. 두 손을 묶고 솜으로 입을 막았다.' 라고 한다.

 

그리고 아이를 귀덕에게 데려가 

 

네가 이 사람을 아는가? 물으니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고,

발을 자른 자가 이 사람인가? 물으니 대답하지 아니했다.

이 사람이 너를 살렸는가? 물으니 고개를 끄덕였고,

이 사람이 너를 데리고 갔을 때 네 발이 잘린 채였는가? 하니 '아니다' 하였다.

 

 

 

 

 

지금까지 증언에 의하면, 귀덕은 처음에 아이의 발이 빠졌을 때 자질금과 을비 등이 보았다 진술했지만

 

두 목격자 다 귀덕이 아이를 살린 걸 보았지만, 발이 빠졌을 때는 보지 못했다고 하니.

 

증언이 서로 어긋난 것을 보아 귀덕이 강력한 용의자로 떠오르게 되지만

 

문제는 피해자인 아이가 분명 한덕이 잘랐다 하니 누구다 할 수 없는 아주 어려운 상황.

 

최소한 한덕이 내쫒은 이후부터 귀덕이 아이를 거두었을 때까지 아이의 다리는 멀쩡했고, 한덕이 발을 잘랐다는 증거나 정황이 없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의금부도 혼란이 오기 시작하여 더이상의 사건조사가 어렵다는 반응을 왕에게 보이는데

 

아이의 말만 믿고 고문을 벌일 수도 없는 입장인데다 한덕과 귀덕중 누구를 심문해야 하는지도 불명확한 상태.

 

결과 '80세 이후와 10세 이전 사람의 말을 무조건 사실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라는 율법을 인용하여 의견을 올림.

 

 

 

반면 중종은 어린아이의 증언을 더 신뢰하는 측이였는데 

 

'80세 이후와 10세 이전의 사람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 못된다 한 말은 옳지만, 다른 사람을 아이에게 보이며 '이 사람이 네 발을 잘랐는가?' 하면 모두 '아니다'하는데,

오직 한덕을 보이면 한덕이 자신의 발을 잘랐다 하니, 아이가 무슨 귀덕과 한덕에게 애증(愛憎)이 있어서 그런 말을 했겠느냐'

 

라며 더 자세한 조사를 명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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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되자 중요하게 떠오른 것은 아이의 발이 아이의 증언처럼 칼에 의해 잘린 것인지, 귀덕의 증언처럼 동상에 의해 저절로 빠진 것인지 아는 것이 되었음.

 

그리하여 의금부에서는 의원을 데리고가 잘린 발목의 상태를 보고, 동상에 의한 것인지 칼에 의한 것인지 확인해보자는 생각을 하였고

 

 

'금부 도사 이창무 등이 의원을 데리고 가서 발이 잘린 여자아이를 살펴 보게 하였습니다.

동상으로 빠진 곳은 두 발의 안팎의 복사뼈와 골구가 완전하며 살은 썩어도 힘줄은 남아 있는 것인데,

이 아이는 끊어진 곳이 이와 다릅니다. 복사뼈 위 정강이 뼈의 부러진 곳이 날짜가 오래되어

새살이 나고 살가죽이 줄어들었으니 칼로 자른 것이 명백합니다.'

 

 

확인 결과 힘줄과 뼈의 상태를 보아 동상으로 인한 상처가 아니다는 의견을 모아서 보고를 올림.

 

그리하여 최고 용의자는 거짓 증언을 한것이 확실해진 귀덕이 되었는데 

 

아직 의심을 버리지 못한 중종은 귀덕과 한덕을 같이 매질해보자는 의견을 내놓았고

 

 

 

 

 

이걸 들은 판의금부사 김금사가 현재 사건의 조사방향과 그 문제점을 크게 지적하는 보고를 올림.

 

 

'과거에 동상에 의해 발을 잃은 사례를 보면, 마치 칼로 잘라 끊어진듯한 모양을 가지는 경우도 있으며,

어린아이 증언 하나로 한덕을 매질하는건 옳지 않은데다 만약 정말로 동상에 의한 것이라면 귀덕에게 죄를 묻는 것도 말이 안 됩니다.

지금이야 심문을 해야겠지만 죄를 단정하려면 조서를 써야 하는데 앞뒤가 맞지 않는 상황에서 어떻게 조서를 쓰겠습니까.

다만 당장 의원들이 칼에 잘린것 같다고 하니 한덕은 빼고 귀덕을 심문하는게 맞는것 같습니다'

 

 

 

 

이에 중종도 굴하지 않고 대답을 써서 전교를 내리는데

 

'아이가 한덕이 발을 잘랐다고 말했을 뿐 아니라 솜으로 입을 막은 상황까지도 분명히 말했으니,

이는 비록 아이라 하나 나이가 4~5세가 넘었는데 무슨 말인들 알지 못하고 무슨 일인들 알지 못하겠는가.

혹은 무슨 원한이 있어 거짓으로 이런 말을 했겠는가. 그러므로 그 아이가 다른 집에 가고 나서

한덕이 쫓아가 몰래 자른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의원은 모두 잘라서 끊어진 것이라 말하므로

정황상 가장 유력한 용의자인 귀덕 역시 추문한 것이었다. 이 일에 대해 해당 부서에서만 의논해서는 안 되니

대신들과 의논하도록 하라.' 

 

 

 

 

 

 

결국 사건발생 보름쯤 지난 2월 30일(음력) 중종은 조선시대 최고행정기관인 의정부의 대신들을 불렀고

 

6살짜리 노비 아이의 발이 잘린 사건에 대해 국가 최고 권력자들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음.

 

 

 

영의정 정광필은,

 

'옥가이가 말한 것을 보면 발을 자른 것은 한덕이 한 짓이 맞는 것 같으나, 

한덕의 집에서 나와 서너 집을 거치다가 끝에 귀덕의 집에 이르게 되는데 두 발이 그 때까진 있었고 단지 동상에만 걸린 상태였습니다.

귀덕이 분명하게 말하기를 자기 집에 이른 후에 두 발이 떨어졌다 하였고, 그것을 보았다고 증언한 자도 있으니, 한덕이 잘랐다는 것도 분명히 아닙니다.

그런데 단지 미욱한 아이의 말만 듣고 큰 옥사를 만드는 것은 부당한 듯합니다.

신의 뜻은 이와 같습니다. 

의심스러운 옥사는 끝까지 밝혀 내지 않더라도 해로울 것이 없을 듯합니다.'

 

하여 사건종결을 청하고

 

 

 

좌의정 장순손은,

 

'신도 이 사건을 들었습니다. 신의 뜻에는 의금부의 아룀이 온당하게 여겨집니다.'

 

라며 의금부의 입장을 지지.

 

 

 

우의정 한효원은,

 

'옥가이의 말로 살펴보면 입을 막고 발을 잘랐음이 지극히 분명하여 4~5세 밖에 안 된 어린아이 가능히 꾸며낼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형추하여 사실을 알아내는 것이 매우 온당합니다.

그러나 귀덕과 돈독 등 여러 사람의 진술서를 보면, 여러 차례 집을 옮겨 다녔으므로 동상이 걸린 것도 또한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이런 의심스러운 옥사는 끝까지 추문하더라도 실정을 알지 못할 것이요, 오히려 무고하게 죽을 폐단까지 있습니다. 

동상에 걸려 발이 빠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상께서 재결하소서.'

 

라고 대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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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은 결국 증거불충분으로 종결. 

 

 

용의자였던 귀덕은 석방되고 한성부, 의금부, 의정부, 정승, 왕이 합심해서 알아본 사건임에도 미제로 남게됨. 

 

더 이상 알아낼 증언도 증거도 없고, 영의정까지 나서 의논했으니 더 의논할 신하도 없음.

 

고문을 한다고 하더라도 고문에 의한 거짓 증언이 될 수 있으며, 고문을 할 근거 역시 애매모호.

 

피해자의 증언은 한덕만이 범인이지만, 정황증거는 무죄라고 말하고 있음.

 

어린 아이기에 거짓증언을 할리가 없다 생각되지만, 반대로 어린 아이기에 잘못된 증언을 할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도 있음.

 

 

 

 

 

500년 전 기준으로 나름 동원할 수 있는 모든걸 동원한 사건이지만 결국 당시엔 어디서도 해결 불가능한 사건이었고

 

다만 피해자가 6살짜리 노비, 용의자도 노비, 증언자도 노비인데도 증언을 받아주고 증거없는 고문을 하지 않았다는 점만이 

 

놀랍게 보였다는 감상밖에 할 수 없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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