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인 사라와 행복한 10년을 보냈다. 나는 늘 아내에게 그녀가 없다면 죽는 게 더 나을 거라고 말했고 아내도 똑같다고 대답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는 걸 확인하면서 일심동체가 된 것 같았다. 말괄량이 2명을 키우면서 더더욱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집 안에는 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암 진단을 받았을 때 아이들에겐 알리지 않았다. 의사는 말기라고 했다. 30대에 그런 진단을 받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난 병원 침대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것보다 집에 있는 걸 택했다. 가족들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집이 내 우울함을 덜어줄 것이다.
2개월이 지나니 죽음이 다가오는 게 확연하게 느껴졌다. 숨 쉬는 것조차 괴롭고 몸을 움직이는 게 힘들었다. 아이들은 내 방에서 간호사 놀이를 하면서 내가 아파 보인다고 말했다. 그 애들은 사탕을 약이라고 칭하면서 물과 같이 먹으면 나을 거라고 말했다. 나는 그 애들에게 "아빠는 못 나아."라고 말할 용기가 없었다.
자신이 죽은 후에 남게 될 책임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사라는 어떻게 아이들을 양육할까. 집세는 낼 수 있을까. 내 약값과 통원비 때문에 거액을 소비하고 있었다. 그녀는 훌륭한 어머니다. 하지만 나 역시 아이들을 지탱할 아버지였다.
사라에게 아직 몸이 움직이는 동안 마지막 저녁 준비를 돕겠다고 말했다. 그녀에겐 무척이나 쉬운 일이었지만 내겐 지옥이었다. 거의 모든 작업이 불가능할 정도로 쇠약해졌고 열도 났기 때문이다. 그녀가 썰거나 섞거나 고명을 얹을 동안 나는 재료 몇 개를 넣는 게 고작이었다.
요리가 끝난 후 아이들을 부를 필요도 없었다. 집 안에 가득 찬 향기에 이끌려 아이들이 방으로 나와 다이닝으로 들어왔다. 난 거의 울 뻔했다. 이 시간이 아프기 전에 계속 함께 가졌던 평범한 식사 시간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아내의 손을 잡고 아이들이 기대에 찬 눈길로 우리가 준비한 식사를 바라보는 걸 지켜보았다. 식사를 하기 직전 나는 오랫동안 마음에 새겨왔던 말을 아내에게 했다.
"당신이 없다면 죽는 게 더 나았을 거야."
"나도."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한 대답을 듣고 나는 내 인생이 행복했으며 내가 옳은 일을 했다고 실감했다.
그리고 내가 만든 마지막 식사를 가족들이 입에 가져가는 걸 보고 내가 섞은 비소가 충분했기를 간절히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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