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자” 뒤에 숨은 덫…감정 흔들며 가짜 거래소로 유인
가상자산 열풍에 편승한 신종 금융사기 수법 ‘로맨스 스캠’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 사기 수법은 데이팅 앱이나 소셜미디어(SNS)에서 매력적인 외국인 이성으로 접근한 뒤 연인 관계를 맺고, 감정을 이용해 가상자산 투자를 유도하는 방식이다. 최근 비트코인 등 주요 가상자산 가격이 급등하면서 이 수법의 피해 사례가 급증하자 금융당국이 소비자경보를 발령했다.
피해자들은 대부분 외국인을 사칭한 계정으로부터 여행지나 음식 추천을 요청받으며 대화를 시작한다. 이후 사기범은 가족 이야기, 결혼 약속, 미래 계획 등을 언급하며 신뢰를 쌓는다. 이때 도용된 인플루언서의 사진과 부유한 배경을 연상케 하는 일상 공유로 호감을 강화하고, 대화 빈도를 높여 친밀감을 높인다. 심리적 거리감을 좁힌 후에는 자신이 성공한 투자 사례라며 가상자산 투자를 권유한다.
이들은 정교하게 제작된 가짜 거래소를 통해 소액 수익을 경험하게 한 뒤, 점차 고액 투자를 유도한다. 한 피해자는 하루 5% 수익률을 보장한다는 말에 1억 원 넘게 투자했지만, 거래소에서 출금을 막고 세금 명목으로 추가 자금을 요구받은 후 연락이 끊겼다. 사기범은 피해자가 의심하거나 더 이상 자금을 보내지 않으면 곧바로 이별을 통보하고 잠적하는 방식으로 사기 행각을 끝낸다.
금융감독원은 2일 “사랑 고백 뒤에 코인 투자 권유가 따라오면 100% 사기로 봐야 한다”며 “가짜 거래소 링크를 받는 순간, 의심부터 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특히 국내 신고 없이 내국인을 대상으로 영업하는 해외 거래소는 불법이며, 금융정보분석원(FIU) 홈페이지에서 등록 여부를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정교한 감정 공략…‘가스라이팅’으로 통제된 피해자
로맨스 스캠의 특징은 단순 금전 요구가 아닌 정서적 조작을 통해 피해자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든다는 점이다. 사기범들은 ‘가스라이팅’을 활용해 피해자가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도록 유도하고, “사랑하니까 같이 투자하자”는 식으로 심리적 압박을 가한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들은 사기의 정황을 인지하더라도 ‘사랑’이라는 감정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투자금을 계속 입금하게 된다.
특히 고독하거나 정서적 위안이 필요한 이들이 주요 타깃이 된다. 피해자 다수는 이혼 후거나 독거 중인 중장년층으로, 진심 어린 관계로 착각하고 모든 것을 믿게 되는 경향을 보인다. 가상의 결혼 약속, 미래에 대한 설계, 심지어 부모 소개 언급 등은 피해자의 경계를 허물기 위한 장치로 활용된다.
한편 사기범들은 실존하는 거래소처럼 정교하게 설계된 가짜 사이트를 운영해 피해자의 의심을 무력화시킨다. UI는 물론 출금 시뮬레이션까지 실제처럼 구현돼 투자자들이 실제 수익을 경험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 하지만 일정 금액 이상 입금한 뒤에는 출금이 차단되고, 추가 입금을 하지 않으면 거래 계좌가 잠기거나 ‘국세청 세금’ 명목으로 자금이 묶인다고 통보받는다.
이러한 수법은 단기간에 큰 돈을 편취할 수 있어 범죄조직의 ‘신종 수익모델’로 각광받고 있다. 일부 범죄조직은 콜센터 방식으로 수십 명이 동시에 SNS로 접근해 유사 수법을 반복하며 피해자를 물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청은 “중국과 동남아 일부 국가에서 조직적으로 운영되는 경우도 다수 확인됐다”고 밝혔다.
◇ 피해 확산 우려에 금융당국, 대대적 홍보 및 단속 예고
금융감독원은 올해 하반기부터 가상자산 투자사기 피해 예방을 위한 대국민 홍보 캠페인을 본격 추진할 예정이다. 대중교통 광고, 유튜브 콘텐츠, SNS 카드뉴스 등을 통해 로맨스 스캠의 수법과 예방 요령을 집중 홍보하고, 피해 의심 시 즉각 신고할 수 있는 체계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금융정보분석원(FIU)과 협조해 가짜 거래소 및 불법 투자사이트를 상시 모니터링하고, 국내 신고 없이 운영 중인 해외 거래소에 대해서는 즉각적인 차단 및 수사의뢰에 나설 계획이다. 금감원은 “해외 사업자라 하더라도 내국인을 대상으로 온라인 영업을 하면 전자금융거래법 위반에 해당한다”며 강력히 조치하겠다고 밝혔다.
아울러 시민단체 및 지자체와 협력해 노년층 대상 금융사기 예방 교육도 확대할 방침이다. 이미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연애사기 방지 교육’을 지역 주민 대상 평생교육 프로그램으로 채택하고 있으며, 금감원은 이를 전국으로 확대하겠다는 방침이다.
피해가 의심될 경우엔 금융감독원 홈페이지 내 ‘가상자산 불공정거래·투자사기 신고센터’나 경찰청 사이버범죄 신고 시스템을 통해 즉시 신고할 수 있다. 금감원은 “피해자가 문자 대화, 입금 내역, 사이트 접속기록 등을 증거로 확보하면 수사에 큰 도움이 된다”고 조언했다.
◇ “가짜 사랑에 속지 말자”…개인 방어력 높이는 것이 최선
로맨스 스캠을 막기 위해서는 제도적 대응과 더불어 개개인의 경각심과 정보력이 필수적이다. 무엇보다 SNS나 데이팅 앱에서 만난 상대가 결혼, 가족 이야기, 자산 관련 상담을 꺼내며 투자 이야기를 한다면 반드시 의심해야 한다. “결혼자금을 마련하자”거나 “단기 고수익 보장” 같은 말은 대부분 사기의 전형적인 문구다.
또한 링크 클릭은 절대 금물이다. 사기범들은 링크를 통해 가짜 거래소뿐 아니라 악성코드가 심어진 사이트로 유도하기도 한다. 금융사기 피해뿐 아니라 개인정보 유출로 이어질 수 있어, 생면부지의 상대가 보낸 링크는 열지 않는 것이 기본 원칙이다.
금감원은 “자신의 판단으로 큰 금액을 보내기 전, 반드시 가족이나 지인 등 제3자의 의견을 구하라”고 조언한다. 연애와 금융을 동시에 이야기하는 상황 자체가 비정상이라는 점을 인지하고, 한 걸음 물러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무엇보다 사기범들은 외모, 감성, 속마음을 교묘히 이용한다. 감정의 진심을 이용한 이 범죄는 단순한 금전 손실을 넘어 정신적 충격을 남길 수 있기에 그 예방은 더욱 중요하다. 진짜 사랑은 결코 투자를 조건으로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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