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고 싶은 변호사들
엄상익변호사
📷
로스쿨을 졸업한 변호사들이 찾아오는 경우가 있다. 무급으로 내 밑에서 도제가 되어 일을 배우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변호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수업료를 내려고 하기도 했다. 찾아오는 젊은 변호사마다 불안감과 미래에 대한 걱정이 표정에 나타나고 있었다. 나도 그랬다. 그들은 내가 살던 시대는 좋았을 것이라고 편견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나는 어땠을까. 나의 상념이 삼십육년 전으로 날아간다. 신변호사의 사무실 구석방을 공짜로 빌린 나는 매일 그곳에 틀어박혀 소설을 읽었다. 사건을 의뢰하러 오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나를 선택해 주세요’ 하고 상품으로 내놓는 것도 자존심이 상했다. 원래 주변머리가 없는 편이었다. 나와는 달리 액티브하게 사업을 벌리는 내 또래도 많았다. 교통사고를 소개하는 전문 브로커들과 손잡고 기업적으로 법률사무소를 운영하는 변호사도 있었다. 또 형사나 검찰서기 법원서기등과 결탁해 형사사건을 맡아 돈을 버는 변호사도 있었다. 보험을 팔려면 영업사원이 있어야 하듯이 변호사사회도 그런 것 같았다. 한번은 일년 후배인 변호사로 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변호사로 성공하는 데 세 가지 길이 있다고 봐요. 첫째는 정치로 나가는 길이야. 두 번째는 미국 유학을 가서 독자적인 전문 분야를 개척해 오는 거야. 그리고 세번째는 내가 개인적으로 생각해 본 거예요. 톱스토엡스키, 톨스토이부터 시작해서 고전을 고시공부 하듯 독파하는 거야. 그렇게 한 이십년 하면 상당한 내공을 쌓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만 나는 다음 총선에서 출마할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변호사를 시작해 보니 이 직업이 단순한 원색이 아니고 다양한 색깔을 포함한 이차색인 것 같기도 했다. 국회의원 변호사도 있고 방송인 변호사도 있었다. 목사인 변호사도 있었다. 변호사라는 기본 바탕색에 잠시 다른 색을 섞을수도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의사도 보건소장을 하면 공무원이고 재벌소속 대형병원의 의사면 회사원이 아닌가.
그 무렵 어느 날 점심시간 같은 빌딩에 있는 변호사들과 함께 서소문 뒷골목의 냉면집에서 점심을 먹은 적이있다.
빚을 내서 변호사 사무실을 차리고 한달 한달을 겨우 넘어가는 힘든 상황이기도 했다. 그래도 그 자리에 함께한 사람은 꿈을 먹고 사는 사람들 같았다. 돈을 못 벌어도 마음들은 대범한 것 같았다. 고시 준비하는 오랜 기간 동안의 결핍은 낙관과 인내를 키워준 것 같기도 했다. 고교선배 신기남 변호사가 입을 열었다.
“나는 그동안 틈이 나면 노래 가사를 써 왔어. 우리나라 가요는 물론 외국 노래의 가사까지 공부했지. 얼마 전에 그중 좋은 걸 유명한 작곡가인 최종혁씨에게 부탁해서 곡을 만들었어. 그 노래가 방송국의 ‘가요 톱 텐’에 들어갔으면 좋겠어.”
독특한 영역에 눈을 돌린 것 같았다. 그가 말을 계속했다.
“내가 사회문제에 대해 토론을 하는 ‘여의도 법정’이라는 텔레비젼 시사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게 됐어. 어떻게 생각해? 그렇지만 나는 남자 직업중 가장 멋있는 직업은 국회의원이라고 생각해.”
그의 지향점을 알 것 같았다. 옆에 있던 주 변호사가 이런 말을 했다.
“변호사가 사건 브로커를 껴야 일거리가 생기듯 정치도 그런 모양이더라구. 선거구 마다 정치브로커가 있어요. 선거를 여러번 치르면서 지역조직을 장악하고 있지. 그럴듯한 인물만 있으면 자기들이 선거운동은 도맡을테니까 공천만 받아오라는 거야. 나한테도 그런 제의가 들어왔어. 결국 공천도 선거운동도 돈인데 우리는 그럴 자금이 없지.”
“그러면 우리 젊은 변호사끼리 당을 하나 만들어야겠네. 가칭 정의당이라고 하면 어떨까?”
신변호사의 말이었다. 그때 말없이 앞에서 듣고 있던 박원순 변호사가 입을 열었다. 그는 제일 후배였다.
“형님들 말이죠 저는 그동안 ‘역사비평’이라는 잡지도 만들어보고 나름대로 여러 활동을 해왔잖아요? 그런데 앞으로는 시민운동을 해보면 어떨까 해요. 아직 이 변호사라는 직업이 지성과 돈을 상징하는 직업이라 괜찮은 편이지만 그런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아래로 내려가 최소 생계비로 칠년정도만 버티면서 활동하면 뭔가 손에 잡힐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들의 앞서가는 사회구조에 대한 인식이나 이념적 지향을 보면서 나는 바보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학 시절 그들의 투쟁경험이 사람을 한 단계 올려놓은 것 같았다. 그 말을 듣고 신변호사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아버지는 지리산 공비토벌의 경찰사령관이었지. 그때 아버지의 계급이 경무관이었어. 이승만 대통령의 경호실장이 곽영주도 경무관이었어. 경찰 출신이라 정보의 힘이 무엇인지 아는 분이었지. 아버지는 인근지역의 작전에 참여했던 박정희보다 더 실질적인 힘이 있었지. 한번은 마을에서 개를 잡아 사령관인 아버지부대에 바친 적이 있어. 술과 고기를 좋아하던 박정희는 그 보급품을 자기 부대에 주지 않자 심술로 아버지 부대에 총을 쏘기도 했대. 우리가 재야운동이다 인권운동이다 하는 데 사실 우리나라 정치의 핵심은 정보기관이야. 여당보다 힘이 센 또 다른 정치세력이지. 정보기관을 알면 많은 걸 깨달을 거야. 참 엄변호사를 보면 사무실에 앉아 첩보소설도 많이 읽는 것 같은데 정보기관에 들어가 몇 년간 취재하면 아주 유익한 경험이 되지 않을까? 많은 걸 얻을 수 있을거야.”
지금 생각하면 그들은 그때 벌써 호랑이 새끼였다. 성장해서 세상을 바꾸고 싶었던 것 같다. 신변호사는 국회의원을 여러 번 하고 노무현 정권에서 여당의 당대표를 지냈다. 박원순 변호사는 참여연대라는 시민운동단체를 만들었고 정계로 옮겨 서울시장을 하고 대통령까지 바라보는 거물로 뒤에 성장한 셈이다.
나는 그들과는 체급이 달랐다. 세상을 보는 통찰력도 없고 능력도 없었다. 내 분수와 그릇이 따로 있는 것 같았다. 능력의 한계를 생각하지 않고 야망을 가지면 망하는 법이라고 할아버지 아버지한테서 배웠다. 그러나 변호사만 하는 건 무채색 같은 느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을 하건 문학을 하건 직업과 삶에 색을 입히고 싶었다. 그 무렵 가끔 놀러오는 내 나이 또래의 택시기사가 있었다. 전에 그의 사건을 맡아 처리하다가 친해진 의뢰인이었다. 책 외판원을 오래 한 그는 소설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앞으로 쓸 소설의 소재를 얻기 위해 택시기사까지 포함해 스무개 정도의 직업을 경험했다고 했다. 그는 반지하 단칸방을 세 얻어 살면서 책을 읽는다고 했다. 그 해 여름 장마때도 책을 읽다가 물이 방으로 넘어 들어오는 것도 몰랐다고 했다. 그는 가난과 자유 그리고 문학을 삶으로 선택했다고 했다. 이상하게 그가 멋이 있어 보였다. 죠지 오웰의 경찰관 체험 노숙 체험이 농도 짙은 사회소설을 만들어냈다. 작가 황석영씨나 정을병씨의 노동체험이 살아있는 소설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나는 작은 사무실에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변호사가 되기로 했다. 인생이 대작이 아니라 소품이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작가가 되는 꿈을 가지게 되니까 좀 더 입체적인 다양한 경험이 필요할 것 같았다. 신 변호사의 말대로 신비에 싸여있는 정보기관을 직접 체험해 글로 써 보고 싶은 호기심이 들었다. 나와 친했던 소설가 정을병씨는 박정희 정권 초기의 강제노동하는 곳으로 들어가 그 내막을 글로 세상에 알리기도 했었다. 그때 나는 아직 밥보다 모험심에 더 끌리는 어리석은 면이 있었다.
- 선택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