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인공지능에 대한 담론에서 “잘 만들어진 빅테크의 AI를 가져다 쓰자”는 주장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그 논지는 간단하다. 이미 미국의 오픈AI, 구글, 메타, 마이크로소프트 등 빅테크들이 만든 고성능 모델이 있으니, 우리가 직접 만들기보다는 그것을 어떻게 잘 활용할지를 고민하는 것이 더 생산적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흔히 엑셀이나 워드 같은 생산성 툴을 예로 든다. 스프레드시트를 우리가 직접 만들 필요 없이 마이크로소프트 제품을 사서 쓰듯이, LLM도 사다 쓰면 되지 않겠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 비유는 AI를 완전히 오해한 데서 출발한다. 엑셀은 정의된 기능과 예측 가능한 인터페이스, 그리고 표준화된 사용 행태를 가진 툴이다. 반면, AI는 비정형 데이터를 다루고, 진화 중이며, 상황에 따라 계속 최적화되어야 하는 비선형적 시스템이다. 다시 말해, AI는 commodity가 아니다. 그 자체로 살아있는 생태계이며, 이를 단순히 ‘잘 만들어진 툴’로 소비하는 방식은 장기적 주권과 전략적 자율성을 포기하는 길이다.
1. AI는 툴이 아니라 프레임워크이자 인프라이다
우리가 오늘날 접하는 LLM이나 생성형 AI는 단순한 소프트웨어 패키지가 아니다. 그것은 언어, 사고, 판단, 추론, 기획, 검색, 요약, 번역 등 인지적 기능 전반을 추상화하여 하나의 플랫폼으로 만든 것이다. 이러한 플랫폼은 기업의 운영체계를 바꾸고, 국가의 행정 효율을 재정의하며, 산업의 분업 구조마저 재편한다.
이처럼 AI는 오히려 "운영체제(Operating System)"에 가깝다. 우리가 외국 기업의 운영체제에 모든 것을 의존한다면, 그 위에 아무리 훌륭한 앱을 만들어도 근본적인 제약을 벗어날 수 없다. 운영체제는 그 자체로 권력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오픈AI의 모델 위에서 우리만의 AI 행정서비스나 교육 시스템을 설계한다 해도, 그 모델의 철학, 훈련 데이터, 알고리즘 구조, 업데이트 정책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이는 진정한 디지털 주권이라 보기 어렵다.
2. ‘제조업 마인드’로는 AI를 주도할 수 없다
우리나라가 AI 반도체 산업을 논할 때, 대부분의 논의는 ‘HBM을 얼마나 잘 만들고 납품하느냐’에 집중되어 있다. AI 산업 전체를 거시적으로 바라보기보다는, 여전히 ‘부품을 얼마나 잘 만들어서 팔 수 있느냐’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이는 전형적인 제조업 마인드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배터리 산업의 성공 경험이 이러한 사고방식을 강화시켰지만, AI에서는 그 방식이 통하지 않는다.
AI 반도체 시장은 단순한 연산 능력을 넘어, 소프트웨어 최적화, 데이터 흐름, 메모리 구조, 모델 설계에 대한 통합적 이해가 필수다. 여기서 중요한 건 어떤 모델을 어떤 방식으로 실행할 것인가에 대한 철학과 전략이다. 그런데 우리가 모델을 통제하지 못하고, 타국이 만든 모델의 실행기만 제조한다면, 이는 단지 ‘부품 납품업체’ 이상이 되기 어렵다. 고부가가치는 결국 플랫폼 레이어에서 나온다.
3. 소버린 AI는 기술 문제가 아닌 전략 문제이다
소버린 AI는 기술적 자립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국가와 사회가 어떤 의사결정 체계를 만들고, 어떤 가치 체계를 반영한 데이터를 수집하고, 어떤 언어로 세상을 인식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지금의 LLM들은 대부분 영어 기반, 서구적 가치관, 자본주의 중심적 세계관을 내포한다. 이는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대로 가져다 쓰면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예컨대, 한국의 행정 시스템이나 교육 체계, 법률 구조는 GPT의 훈련 기반과 다르다. 의료 정보, 문화 코드, 역사적 맥락, 지역 언어 등은 각국의 상황에 따라 달라야 하며, 이를 반영하려면 AI의 학습 구조 자체에 영향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소버린 AI는 선택이 아닌 필수적인 국가전략 자산이다.
4. 생태계와 피드백 루프의 통제력
AI의 핵심은 모델이 아니라 피드백 루프에 있다. 훈련-실행-평가-재훈련 과정을 통해 지속적으로 개선되는 것이 현대 AI의 본질이다. 이를 통제하지 못하면, 우리는 단지 소비자일 뿐이며, 사용 과정에서 나오는 데이터마저 다시 공급자의 학습재료로 활용되게 된다. 결국 AI의 주도권은 누가 피드백 루프의 소유자인가에 의해 결정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단순히 API를 활용하는 것을 넘어서, 모델 구조를 설계하고, 데이터 파이프라인을 통제하고, 훈련 인프라를 보유하며, 사용자 피드백을 반영하는 전체 생태계 구조를 설계해야만 진정한 자립이 가능하다.
5. 소버린 AI는 ‘자립’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도’를 위한 것이다
흔히 소버린 AI를 “우리가 독자적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식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이는 절반만 맞는 이야기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미래 산업과 사회 구조의 방향성을 주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형 AI 교육 시스템을 만들고, K-헬스케어 모델을 구축하고, 법률·정책·문화·행정에 특화된 AI 에이전트를 개발하려면, 우리는 모델 그 자체의 구조를 설계할 수 있어야 한다. ‘사다 쓰는’ 방식으로는 이 수준의 통제권을 확보할 수 없다.
결론: ‘엑셀 사고방식’은 AI 시대의 함정이다
AI를 엑셀처럼 사다 쓰는 툴로 인식하는 것은 편리하지만, 전략적으로는 매우 위험한 태도다. 엑셀은 표가 망가지면 다시 열면 되지만, AI는 우리가 어떤 언어로 세상을 정의하고, 어떤 데이터를 기준으로 사고하며, 어떤 구조로 판단할 것인가를 결정짓는 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버린 AI는 단지 기술적 자립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의사결정권, 사회적 가치의 반영, 디지털 주권 확보, 나아가 글로벌 AI 패권에서의 주도권을 위한 핵심 아젠다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각국은 AI를 통해 국방, 산업, 금융, 교육, 행정의 판을 다시 짜고 있다. 우리가 엑셀 사고방식에 머무른다면, 이 거대한 변혁에서 다시 한 번 주변부에 머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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