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화엔 성공했으되 민주화는 요원
계엄은 시대착오적 主君정치가 근원
이 국가환란을 민주화 완성 계기로
계엄사태 극복의 출발점이 윤석열(대통령) 지우기임에도 온 나라가 그에 쥐어 잡혀있다. 윤은 고개를 곧추세우고, 지지자들은 여전히 기세등등이다. 희망을 말할 수 없던 설 명절은 어둡고 우울했다. 어쩌자는 것인가. 대한민국의 국격과 선진국민의 자긍심을 순간에 결딴낸 그를 대통령으로 다시 되돌리자는 건가.
윤 옹호론의 골격은 ‘야당의 입법독재가 계엄을 유발했다’는 것이다. 이 명제는 야당의 탄핵·특검 남발이 국헌문란 내란이고, 이에 맞선 윤의 계엄은 대통령의 국헌수호 책임을 이행한 것으로 확장된다. 계엄은 실패했어도 최소한 국민계몽 역할은 해냈으므로 윤은 내란수괴가 아니라 구국의 영웅이다.
사실을 이렇게까지 전도시키면 안 된다. 집권 이래 윤이 부인 문제에서부터 인사전횡 정책무능에 이르기까지 독선과 불통, 무시와 어깃장으로 일관한 결과가 지난 총선궤멸이다. 게다가 이종섭 출국 건 등으로 막판 유동표까지 그 혼자서 알뜰하게 말아먹었다. 민주당에 주체 못 할 압승을 가져다줘 입법독재의 칼춤을 출 수 있도록 판을 깔아준 원죄는 정작 윤에게 있다.
모두가 착각하는 게 있다. 우린 산업화엔 성공했으되 민주화는 아직도 도정(道程)에 있다. 절차적 민주화를 달성한 87년 체제의 내용은 채워지지 않았다. 우리 정치가 여전히 전근대적인 인물정당, 주군(主君)정당이라는 점에서다. 이승만 박정희 YS DJ 같은 거대정치인들에 의존해온 정치체질이 굳어진 것 때문이다. 시대가 바뀌었어도 맹종정치는 그대로다. 아득한 춘추전국시대에 이미 명재상 관중이 “주군이 아닌 나라를 섬기는 게 진정한 신하”라 했음에도.
이러니 민주화의 핵심 내용인 자율 숙의 절충 합의 등은 제대로 구현된 적이 없다. 정치갈등의 대상이 대부분 가치·정책이 아닌 주군에 대한 충성 여부에 집중되기 때문이다. 정치적 이견이 배신, 내부 총질로 매도되고 온건 합리형 정치인일수록 내쳐지는 이유다. 청산되지 못한 주군정치의 폐해가 극단화한 게 지금 윤석열의 국민의힘이고 이재명 일극(一極)의 민주당이다.
더 부연하자면 우리나라는 더 이상 “나를 따르라” 식 지도자를 필요로 하는 개발도상국이 아니다. 경제, 과학, 사회, 문화 모든 분야마다 자체 추동력을 갖고 굴러가는 선진국이 돼있다. 이 수준에선 상식과 균형감을 갖춘 관리·조율형 지도자면 된다. 저만이 판단을 독점한 지도자는 도리어 국가의 안정적 기반을 허물고 치유 못 할 상흔만 남긴다. 역설적으로 계엄사태는 진짜 민주화의 틀을 구축하는 절호의 계기일 수 있다. 자폭한 윤석열과 자멸해가는 이재명 같은 시대착오적 주군들에게 더는 눈길 줄 여유가 없다는 뜻이다.
추상적 담론을 치우자면 포스트尹·李의 대안으로 유승민, 김부겸 같은 이들에 주목할 만하다. 독선 불통 지역주의와는 멀고 나름 합리적 정치철학과 시대적 안목을 갖추고 있으며, 무엇보다 진영에 매몰되지 않고 열광지지층이 형성될 강성인물이 아니란 점에서다. 오해 말기 바란다. 구체적으로 거명한 건 윤·이와 대척점에 있는 상징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오세훈 김동연도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면 당내 경선 분위기부터 바뀔 것이고, 또 이들이 길을 내야 추후 민주적 정당문화에서 한동훈 이준석 박용진 같은 차세대도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인 탓만 할 것도 아니다. 헌정을 파괴하고 정당민주주의를 무너뜨린 이들에게 여전한 지지를 보내는 국민들도 각성할 필요가 있다. 정치는 결국 국민이 바꾸는 것이다. 이 파괴적 국가환란을 차제에 완전히 새로운 판으로 극복하지 못하면 지금 겪는 고통의 시간이 너무도 허망할 것 같지 않나.
이준희 고문 (jun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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