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적 세탁하고 세금 탈루한 '검은 머리 외국인' 사업가도 조사
(세종=연합뉴스) 민경락 기자 = 성형외과 의사인 A는 국내 성형 시장이 포화 상태에 이르자 동남아로 눈길을 돌렸다. 이른바 '해외 원정 진료'로 사업을 확장하기로 한 것이다.
다만 해외 진료는 '현지 병원 세미나'로 위장했다. 현지에서 돈을 벌지 않았다는 점을 부각하기 위해서였다. 성형시술을 하고 받은 돈을 가상자산으로 챙기는 수법으로 공식적인 매출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A는 이렇게 수차례 원정 진료를 통해 빼돌린 가상자산을 국내 거래소에 매각한 뒤 외국인의 차명계좌를 이용해 현금자동입출금기(ATM)로 수백회에 걸쳐 현금으로 인출했다. 이 현금은 다시 A의 계좌로 역시 수백회에 걸쳐 입금됐다.
국적 세탁해 국내서 호화생활한 '검은 머리 외국인'
A는 특수관계법인에 외국인 환자 유치 용역을 넘긴 뒤 과다한 수수료를 주는 수법으로 소득세를 탈루하기도 했다.
하지만 은닉 가상자산이 국내에서 인출되는 과정에서 당국에 이상 거래 혐의가 포착됐고 결국 A는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세무당국은 A의 소득 수십억원에 대한 세금을 추징하기로 하고 세무조사에 착수했다.
국세청은 역외탈세 혐의자 41명을 상대로 세무조사에 착수했다고 2일 밝혔다.
이 중에는 A의 사례처럼 해외 원정 진료나 해외 현지법인을 이용한 탈세 혐의자 13명이 포함됐다.
세무당국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이름·주민등록 등을 지우고 국적을 바꾸거나 법인 명의를 위장한 신분세탁 탈세자 11명도 국세청의 타깃이 됐다.
해외 미신고 사업으로 얻은 소득을 해외 비밀계좌에 은닉해온 B는 현지 투자 조건으로 시민권을 주는 이른바 '황금비자'를 통해 조세회피처로 알려진 국가의 국적을 취득했다.
그는 잠시 외국에 머문 뒤 국내 '외국인'으로 입국했고 해외에 숨긴 자금도 일부 투자 명목으로 국내에 반입해 호화 생활을 하는 대담함을 보였다.
해외 자산·계좌의 소유주가 외국인 명의로 바뀌면 과세당국이 국가 간 정보 교환 등을 통해 현황을 파악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는데 이런 점을 교묘히 악용한 것이다.
B는 해외 은닉자금을 외국인 동거인의 국내 계좌에 송금하고 그 자금으로 부동산을 구입하기도 했다.
국세청은 B의 해외 탈루소득 수백억원에 대해 소득세를 부과하고 동거인에게도 증여세를 추징할 계획이다.
세무당국 추적 피하려 가상자산·역외펀드에만 '올인'
직접 가상자산을 발행하거나 용역 대가를 가상자산으로 받는 수법으로 수익을 빼돌린 코인개발업체 9명도 조사 대상이다. 이들은 가상자산을 판매해 얻은 차익까지 빼돌려 세금을 내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일부 사주는 과세당국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재산을 가상자산·역외펀드로만 축적하고 부동산 등 국내 자산은 매입하지 않았지만 결국 국세청에 덜미를 잡혔다.
국내에서 키운 핵심 자산을 해외로 빼돌린 다국적기업 8곳도 세무조사를 받는다.
이들은 국내 시장에서 성장한 국내 자회사의 핵심 자산 등을 정당한 대가 없이 국외 특수관계자에게 매각·이전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렇게 해외로 유출된 핵심 자산은 기술·특허뿐만 아니라 콘텐츠 배포권, 영업권, 고객 정보까지 다양했다.
한 국내 자회사는 국내 제조·판매 기능을 국외 관계사에 대가 없이 이전하면서 직원들을 해고해야 했지만 모회사로부터 관련 비용도 제대로 보전받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내국법인 C는 해외 거래처에서 받은 수출대금을 미신고 현지법인에 빼돌리는 수법으로 법인 자금을 유출한 뒤 사주의 원정도박 자금, 사주 자녀 해외 체류비 등에 사용했다가 국세청에 꼬리를 밟혔다.
정재수 국세청 조사국장은 "사회적 책임과 납세 의무는 외면한 채 경제위기 극복에 사용돼야 할 재원을 국외로 유출한 것"이라며 "역외탈세 수법이 갈수록 지능화·고도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rock@yna.co.kr
민경락(roc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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