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고 두 개에 수십만 원…미국인 절반 "의료비 감당 안 돼"
미국에서 알레르기 때문에 피부과를 찾은 적이 있었습니다. 사설 보험에 가입하고 있지만, 해당 피부과는 제 보험으로는 혜택을 받지 못하는 곳이었습니다. 3분 간의 의사 진료 뒤 병원이 요구한 비용은 2백 달러(27만 원). 의사는 연고 두 개를 처방해 줬습니다. 보험이 적용되는 연고라며 원래 가격의 20~25%만 개인이 내면 된다고 약사는 설명해 줬습니다. 그렇게 지불한 돈은 각각 100달러(13만 8천 원)와 50달러(6만 9천 원). 연고 두 개 가격이 수십만 원 상당이었던 겁니다.
미국의 의료 서비스가 과도하게 비싸다는 걸 부인하는 미국인은 없습니다. 미국 의료보험(메디케어 및 메디케이드) 서비스 센터에 따르면 2023년 전국 의료비 지출은 7.5% 증가한 4조 8천억 달러(6천647조 원)로 예상됩니다. 의료 정책을 연구하는 비영리단체 KFF 조사 결과 미국 성인의 약 절반은 의료비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답했습니다. 드류 알트먼 KFF CEO는 "사람들은 의료 서비스를 경제와 별개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유권자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그들의 머릿속에서 의료와 경제는 분리돼 있지 않다. 의료 서비스는 경제 문제"라고 덧붙였습니다.
이렇게 많은 의료비를 내면 흡족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을까요? 그렇지 못하다는 게 미국인들의 견해입니다. 특히 도심보다 지역의 불만이 큽니다. 돈도 돈이지만 아예 의료기관들이 지역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 붕괴된 미국 지역 의료…"응급환자 이송에 1~2시간"
6월 초, 취재진이 찾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마틴 카운티는 전형적인 미국 농촌 지역입니다. 인구는 2만 2천 명, 이 가운데 65세 이상이 4분의 1이 넘습니다. 빈곤율은 20%가 넘습니다. 이 지역에 있던 유일한 종합병원 '마틴 의료원'이 문을 닫은 건 지난해 8월이었습니다. 재정난 때문이었습니다.
취재진이 문 닫은 병원을 찾아 건물로 접근하려 하자 경비원이 건물 근접 촬영과 접근을 막아섰습니다. 수소문해 찾은 스티브 매닝 전 마틴 종합병원 부원장은 취재진과의 통화에서 "폐원 전부터 업무가 중단되고 서비스가 중단되고 전반적 수익도 줄었다. 병원이나 지역 사회가 더는 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는 판단이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마틴 카운티에서는 주민들이 참석한 운영회나 하원의원과의 공청회 등이 있었지만 분노한 주민들의 의견을 듣는 것 외에 진전이 없었습니다.
주민들이 가장 우려하는 건 응급실이 사라졌다는 겁니다. 마틴 종합병원이 사라지며 이 지역은 물론 반경 25km 내에선 응급 의료시설을 찾기 어렵게 됐습니다. 응급 구조에는 그만큼 시간과 인력이 더 필요하게 됐습니다. 지역 소방구조대의 케니 워렌 소방경은 "예전에는 20~30분 걸리던 출동이 지금은 이송 병원에 따라 1~2시간까지 걸린다. 소방차 한 대에 직원과 자원봉사자를 배치했던 게 지금은 두 대에 인력을 24시간 배치하고 항상 출동 대기하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대형 병원이 문을 닫으면서 연계돼 있던 지역의 소규모 병원과 약국들이 잇따라 문을 닫았고, 의사와 약사들은 마을을 떠났습니다. 지난해 말 '레겟 약국' 문을 연 약사 애쉴리 레겟 씨는 주민들의 어려움이 가중된 게 고향에 약국을 열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고 말했습니다. 레겟 약국 16km 반경엔 약국이 하나도 없습니다. 레겟 약사는 "의료 상황이 악화되며 주민 개개인의 건강관리 수준이 현저히 떨어지고 있다"고 견해를 밝혔습니다.
■ 코로나 19 지원 줄고 임금 오르고…가속화된 지역 병원 폐원
병원이 사라지는 곳은 주로 인구가 감소하고, 주민들의 보험 가입 상태가 취약하거나 급여 수준이 낮은 곳이 많습니다. 고령 인구가 많다는 것도 특징입니다. 2010년 이후 미국 전역에서 149개의 지역 병원이 문을 닫거나 기능을 전환했다는 통계가 알려지며 지역 의료 시설 부족 문제는 공론화됐습니다. 450여 개 병원은 재정에 빨간 불이 켜져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특히 코로나 19 때 확 늘었던 정부 지원이 줄고, 물가와 임금이 동반 인상되면서 폐원을 가속화 했다는 분석입니다.
취재진이 만난 주민 다이애나 레서더 씨는 "주치의를 만나려면 한 시간이나 한 시간 반을 가야 하는데 여긴 교통편이 마땅치 않다. 우리 지역에는 운전을 할 수 없는 노인들이 많다. 특히 지역 내 흑인들의 피해가 크다"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주민 조니 밀스 씨는 "나는 심장에 인공 판막 2개, 심박조율기가 있고 당뇨병도 있다. 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 의료보험 갱신하라고 매번 우편물이 오고 전화가 울릴 때마다 진저리가 난다"고 화를 냈습니다.
마틴 카운티는 문을 닫은 마틴 종합병원을 '농촌 응급 병원'으로 바꿔 다시 여는 걸 추진 중입니다. '농촌 응급 병원'은 2021년 미 의회에서 통과된 통합세출법에 근거한 새로운 형태의 지역 병원입니다. 의료가 낙후한 지역에서 응급 상황에 필요한 병상 외에는 입원 병상을 운영하지 않는 방식으로 인건비를 줄여 응급시설을 유지하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바꾸는 절차도 산 넘어 산입니다. 농촌 응급 병원 건립을 추진 중인 마틴 카운티 정부의 벤 아이스너 임시 관리인은 "환자들은 이미 치료를 받기 위해 떠나버렸습니다.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운영자를 찾기 위해 노력 중인데 건물을 개조하거나 재건축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의사와 간호사, 직원과 보조 인력들을 숙련된 인력으로 모두 다시 찾아야 합니다. 정말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어려움을 호소했습니다.
조지 핑크 노스캐롤라이나대 교수는 미국 정부가 그간 운영해온 여러 농촌 병원 폐업 방지 프로그램들이 큰 소득을 거두지 못했다고 평가했습니다. 이젠 병원의 폐쇄가 지역의 쇠락과 상호 작용을 일으키고 있다고도 분석합니다. "병원은 일반적으로 지역의 가장 큰 고용주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병원이 문을 닫으면 병원은 물론 병원 직원들이 납부하던 세수를 지역이 잃게 되죠. 아이가 있을 만한 연령대의 인구는 아이들이 병원에 갈 수 있는 지역에 살기를 원합니다. 예를 들면 2~40대의 교사들이 그래요. 의료진이 아닌 다른 젊은 인구도 줄어들게 되는 거죠."
■ 정치권 공방은 '의료비 절감'만…지역 목소리 대변은 누가?
미국 정치권의 의료 서비스에 대한 대책은 아직까지 지역 병원으로까지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는 11월 대선 후보인 바이든 대통령과 트럼프 전 대통령이 내놓고 있는 대책은 의료비 절감에 주로 집중돼 있습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그가 '오바마케어'로 알려진 건강보험개혁(Affordable Care Act) 지원을 축소하는데 박차를 가할 것으로 전망합니다. 보수 성향 헤리티지 재단이 작성한 트럼프 차기 행정부 정책 로드맵 '프로젝트 2025'는 "의료보험(메디케이드) 혜택 기간 제한 및 평생 상한선"을 부과할 것을 제안합니다. 메디케이드(Medicaid)는 65세 미만 저소득층과 장애인을 위해 각 주에서 운영하지만, 재정은 연방정부와 주 정부가 함께 부담하는 미국의 의료보험 제도인데, 수혜 대상을 줄이자는 겁니다. 정부가 약값 인상을 제한하기 위해 가격 협상에 나서는 건 "가격 통제"라며 관련 법을 폐지할 것도 촉구하고 있습니다. 환자 입장에서 크게 혜택이 돌아가기 힘든 방향이어서인지 트럼프 전 대통령이 내세우는 의료 복지 정책은 아직 선명하지 않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정반대의 정책을 추구합니다. 이미 재임 중 메디케이드 자격 소득 수준과 가입 절차를 완화해 가입자를 크게 늘렸습니다. 2022년 승인한 '인플레이션감축법'을 통해 국가가 의료비 80%를 지원하는 메디케어가 제약회사와 약값을 직접 협상해 가격을 낮출 수 있도록 근거를 마련했습니다. 이런 성과들을 노인층 공략에 적극 활용한다는 게 바이든 캠프의 계획입니다. 비영리 의료단체 KFF의 5월 여론조사에서 유권자 10명 중 7명은 메디케이드가 지금처럼 유지되길 원했고, 3명은 연방정부 지원금을 제한하고 주 정부가 더 유연하게 보험을 설계하도록 변경하는 공화당 방안을 지지했습니다. 수치로 보면 민주당에 유리한 조사 결과입니다.
하지만 높은 의료비 문제 해결을 누가 잘해줄 것 같냐는 질문에는 양쪽 다 과반의 신뢰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대선에서 의료 복지 문제는 다른 쟁점에 비해 이슈화가 덜 되는 분위기입니다. 특히, 농촌 의료 공백이 정치권의 관심을 얻지 못하는 건 수혜자가 돼야 할 사람들이 '저소득 고령 유권자, 인구가 줄어 관심을 얻지 못하는 지역이어서'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이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줄 사람, 정치인이 그만큼 적다는 겁니다.
이정민 (mani@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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