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청일전쟁(1894년)과 러일전쟁(1904년)이 발발한 지 각각 130년, 120년 되는 해다. 두 전쟁은 한국인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지금 대한민국이 발 딛고 있는 지정학의 지각판이 이 두 전쟁에서 조성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지각판은 지금도 꿈틀꿈틀한다. 한국인들은 그러나 두 전쟁을 고색창연한 역사적 사실로만 암기할 뿐이다.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배하면서 1천년간 대륙이 한반도에 행사해온 종주권이 공식적으로 폐기되었다. 한국이 더 이상 중국에 조공하지 않는 나라, 형식적일망정 자주독립국이 된 것은 이홍장과 이토 히로부미가 서명한 시모노세키 조약에 의해서였다. 그 결과 일본이 한국에서 실질적으로 청의 역할을 대체할 것이 명약관화해 보였다.
일본이 부상하는 것을 당시 유럽의 열강들은 인종주의적 편견(황화·黃禍)과 지정학적 경쟁심이 뒤섞인 못마땅한 심사로 바라보았다. 러시아·프랑스·독일 삼국이 간섭해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획득한 랴오둥반도 할양을 무효화시켰다. 조선 정부는 예민하게 반응했다. 러시아가 일본보다 더 세다고 본 친러파가 늘어났다. 세력 퇴조에 위기를 느낀 일본 공사가 을미사변을 일으켜 ‘친러파 수괴’ 민비를 죽였다. 질겁을 한 임금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갔으니 ‘아관파천’이다. 그 결과 러시아는 한반도에 뒤늦게 진출하고도 일본과 대등한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
러시아 군대는 의화단의 난(북청사변)을 계기 삼아 만주에 주둔했다. 이는 일본 입장에서 만주를 향한 기회의 창이 닫히는 것, 머지않아 러시아군이 한반도까지 내려오는 것을 의미했다. 1903년 러시아 군대가 압록강 하구를 점령하고 조차를 요구하는 ‘용암포 사건’이 터지면서 일본의 불안은 신경증적으로 발전했다. 일본은 만주에서 러시아의 철도경영 권익을 보장하는 대가로 한국에서 일본의 우선권을 인정할 것을 러시아에 제안했으나 반응이 싸늘했다. 그 후로 일본에서 ‘주전론’이 득세했다.
일본 근대사 연구자 야마무로 신이치는 러일전쟁이 동아시아 세계에서 갖는 의미를 이렇게 요약한다. “(그것은) 일본에게 ‘조선 문제’, 곧 청일전쟁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과제로 남은 한국의 배타적 지배라고 하는 문제의 결착이었다. 러일전쟁은 확실히 일본과 러시아의 전쟁이고, 결과적으로 만주에 대한 일본의 진출을 촉진해 버렸지만, 그 속에서 진행되어 간 더욱 중요한 사태, 그것은 일본에 의한 한국의 보호국화였다.”(‘러일 전쟁의 세기’ 中) 러일 전쟁을 좁히고 좁혔을 때, 핵심 이해는 한반도 지배에 있었다는 얘기다.
한국인들에게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은 둘 다 불쾌한 전쟁이다. 한반도라는 먹잇감을 놓고 주변 강국들이 야수처럼 뒤엉켰다. 두 번 다 일본이 이겼고 그 결과 한반도를 일본이 차지했다. 한국인들이 불쾌한 것은 자기 삶의 터전이 타국의 쟁탈 대상이 된 데 대한 굴욕감, 그 과정에서 몹시 무기력했던 스스로에 대한 자기혐오 때문이다. 한국인들이 일본에 대해 느끼는 부정적 감정은 그 두 전쟁의 승자가 된 일본으로부터 그 후로 오랫동안 지배당한 결과다. 역사는 ‘두 전쟁의 승자가 일본이 아니라 청이나 러시아였다면?’으로까지 넘어가는 법이 없다. 그것은 무익한 가정이다.
그러나 상상은 자유이니 나는 러일 전쟁의 승자가 일본이 아니라 러시아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가끔 한다. 체스를 할 때 한번 두어진 말은 그 이후 체스판의 전개 양상을 모두 바꾸어 놓는다. 러일 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했다면 이후 세계사는 우리가 아는 것과 생판 다른 양상으로 전개됐을 가능성이 있다. 가령 로마노프 왕조의 수명이 더 길어졌을 수도 있고 그렇다면 러시아 공산혁명이 반드시 일어났으리라 확신할 수도 없다. 그 결과 지금 우리가 보는 러시아의 모습도 달라져 있을 가능성이 있다.
역사는 하나의 사건이 뒤이은 사건을 불러오는 식으로 전개되지만 그 과정에서도 잘 변하지 않고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은 국민성이다. 20세기 국제정치학의 거장 한스 모겐소는 저서 ‘국가 간의 정치’에서 러시아 국민성을 ‘원시적인 힘과 끈기’로 규정하였다. 그는 비스마르크 회고록을 인용하여 이런 일화를 전하고 있다. 1859년 비스마르크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했을 때 잔디밭 한가운데에 보초병이 서 있었다. ‘왜 저런 데서 보초를 서나’ 하는 궁금증에 자초지종을 알아보았다. 예카테리나 여제 시절(1729~1796) 제철보다 일찍 만개한 아네모네꽃을 본 여제가 아무도 그 꽃을 꺾지 못하게 명령을 내렸고 이후 보초는 수십년 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고 한다.
이런 원시에 가까운, 합리성과는 담쌓은, 시베리아 침엽수림처럼 압도적인 뚝심이 나폴레옹과 히틀러로부터 러시아를 지켜낸 힘이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러시아 스스로에게는 자긍의 원천이겠지만 주변국에는 두려움을 일으킨다. 나는 러시아가 설령 러일전쟁에서 이기고,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2024년에 내가 마주하는 러시아는 지금과 거의 비슷하지 않을까 상상한다. 국민성은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되고 잘 변하지 않는 법이다.
서구적 자유주의에 익숙한 필자는 러시아적 전체주의를 한 번도 동경해 본 적이 없다. 따라서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하고 한반도가 러시아의 위성 체제에 편입되는 역사적 가정은 나를 소름 돋게 한다.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선언 이후 소련군은 마음만 먹었으면 미군이 서울에 당도하기 전에 남한을 접수할 수 있었다. 만약 그때 스탈린이 좀 더 과감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도 역시 소름 돋는다. 6.25 발발 후 트루먼 행정부가 즉각 참전을 결단한 것은 냉전적 윤리관에 지배될 때였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현실이 이념을 압도하는 세계관이었다면 한국은 소련의 위성국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아찔한 상상이다.
지금까지 러시아는 그런 상상의 유희속에서나 나를 전율케 하는 나라였다. 내 일상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먼 동토의 나라…. 푸틴의 평양 방문, 위협의 강도가 확 올라간 북러 동맹이 러시아라는 나라를 관념에서 일상으로 옮겨놓았다. 러시아가 한반도 주변국이라는 엄정한 현실을 많은 한국인이 직시하기 시작했다. 그 원시적 힘의 나라가 100여년 전에 그랬듯이 오늘날에도 우리의 운명에 개입할 수 있다는 현실에 소름이 돋는 것이다.
노원명 기자(wmnoh@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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