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 제도화’ 간호법에 직능 갈등 재점화
서울의대·서울대병원 교수들이 ‘무기한 휴진’을 닷새만에 중단하면서 연세의대·세브란스병원과 울산의대·서울아산병원 교수들이 예정대로 무기한 휴진을 강행할지 주목된다. 환자단체가 의료계 집단휴진 철회와 재발방지를 촉구하는 총궐기대회 개최를 예고한 가운데, 넉 달 넘은 의·정 갈등을 타결할 본격적인 대화는 여전히 요원하다. 대한의사협회(의협)는 전공의·의대생이 빠진 협의체 첫 회의를 통해 “2025년 정원을 포함한 의·정협의에 참여할 의사가 있다”고 한 반면, 정부는 “2025년 정원은 절차가 마무리돼 협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재확인했다.
◆서울의대 ‘무기한 휴진’ 중단, 확산하나
23일 의료계에 따르면 연세의대·세브란스병원 교수들은 27일부터 시작하기로 한 무기한 휴진을 강행할지를 두고 고심하고 있다.
앞서 서울의대·서울대병원 교수협의회 비상대책위원회는 전공의 등에 내려진 명령 취소 등 정부의 태도 변화를 요구하며 무기한 휴진에 나선 지 5일 만인 21일 휴진 중단을 선언했다. 서울대병원, 분당서울대병원, 서울시보라매병원, 서울대병원강남센터 등 4곳 병원 전체 교수 대상으로 실시한 투표에서 응답자 948명 중 698명(73.6%)이 “휴진을 중단하고 ‘지속 가능한 방식의 저항’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답했다. “휴진을 지속해야 한다”는 의견은 192명(20.3%)이었다.
연세의대 교수 비대위는 서울의대 교수 비대위의 휴진 중단 배경 등을 파악한 뒤 내부 회의나 전체 교수 투표 등을 거쳐 무기한 휴진 강행 여부를 결정할 것으로 알려졌다. 다음달 7일부터 무기한 휴진을 예고한 울산의대 교수 비대위도 고민 중인데, 다만 1주일간 휴진한 뒤 연장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던 만큼 연세의대 비대위 결정에 따라 대처 방향이 달라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서울의대 비대위 결정은 가톨릭의대와 성균관의대 비대위 결정에도 영향을 줄 전망이다. 서울성모병원이 포함된 가톨릭대 의대 비대위는 23일까지 설문한 뒤 25일 총회에서 휴진을 결정할 예정이고, 삼성서울병원이 속한 성균관의대 비대위도 25일 교수 총회에서 휴진 방안을 논의할 계획이다.
대한의사협회(의협)가 출범한 ‘올바른 의료를 위한 특별위원회(올특위)’는 22일 첫 회의를 열고 “연세의대 및 울산의대의 정해진 휴진계획을 존중한다”며 “향후에는 각 직역의 개별적인 투쟁 전개가 아닌, 체계적인 투쟁계획을 함께 설정해나가기로 의견을 모았다”고 밝혔다. 임현택 회장이 선언한 ‘27일부터 무기한 휴진’ 계획에 대해 언급하진 않았지만, 계획에 변함이 없다는 입장이다. 올특위는 “‘형식, 의제에 구애 없이 대화가 가능하다’는 정부의 입장을 환영한다”며 “2025년 정원을 포함한 의정협의에 참여할 의사가 있음을 밝힌다”고 덧붙였다. 정부는 의료계와 대화하겠다면서도 “2025년 의대 정원은 협의 대상이 아니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2025년 의대 증원을 두고 올특위와 정부 입장이 첨예한 상황인데다 의료현장을 떠난 전공의와 의대생이 올특위에 참여하지 않으면 의·정 대화가 이뤄져도 의미가 없다는 지적이다.
◆환자단체, “휴진철회·재발방지 총궐기대회”
의·정 갈등에 따른 의료공백이 4개월을 넘어가자 집단휴진에 나선 의료계에 대한 비판도 거세지고 있다. 환자단체들은 외국 의사 조기 투입을 요청하는 공청회를 제안하고, ‘의사 집단휴진 철회 및 재발방지법 제정 촉구 환자 총궐기대회’를 예고했다.
한국암환자권익협의회·한국췌장암환우회·한국루게릭연맹회·한국폐암환우회·한국다발골수종환우회·한국식도암환우회 등이 모인 한국중증질환연합회는 최근 보건복지부에 ‘외국 의사의 국내 진료를 허용할 필요성이 있다’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다.
연합회는 “최근 국내 의사들의 집단 휴진으로 인한 의료공백 사태가 심각해지고 있어, 이에 대한 긴급대응책으로 외국 의사를 초청해 진료를 허용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입법예고 기간 (의사단체 등의) 반대 의견이 다수를 이뤘지만 실제 의료현장에서 환자와 국민은 의료공백을 막기 위해 외국의사들의 진료 허용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지배적”이라고 주장했다.
앞서 정부는 외국 의사의 국내 의료행위 허용 관련 의료법 시행규칙 일부개정안을 입법예고하고, 대규모 의료공백으로 보건의료 위기 경보가 최고단계인 ‘심각’일 때에 보완적 조치 시행 가능성을 시사했다. 연합회는 “국내 체류 중인 외국 의사면허 소지자가 수백 명 이상 확인되는데 이들의 의료현장 조기투입 등 대책 마련을 고민해야 할 때”라면서 공청회 개최를 촉구했다.
한국환자단체연합회는 한국유방암환우총연합회와 함께 7월4일 오전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의사 집단휴진 철회 및 재발방지법 제정 촉구 환자 총궐기대회”를 개최할 계획이다. 이들은 의료계가 예고한 무기한 휴진 철회를 촉구하고, 의사 집단행동 재발 방지를 위한 관련 제도와 법률을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PA간호사 제도화’에 직능 갈등 재점화?
의사·약사와 간호사들이 이견을 보여온 간호법 제정을 두고도 갈등이 확산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특히 간호법에는 의료현장을 떠난 전공의들 공백을 메우고 있는 진료지원(PA) 간호사들의 업무를 현실적으로 합법화하는 내용 등을 담고 있다. 간호법 제정 과정에서 의·정 갈등이 더 확산할 여지도 있다.
국민의힘은 20일 ‘간호사 등에 관한법률 제정안’(간호법)을 발의했다. 이 법안은 의사 인력이 부족한 현실을 고려해 전문 간호사뿐 아니라 일반 간호사도 일정 요건 아래 PA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더불어민주당도 19일 간호법안을 발의하고 20일 의원총회를 통해 간호법안을 당론으로 채택했다.
이에 간호사단체는 환영의 뜻을 밝혔고, 의·약사단체가 “타 직능의 고유업무를 침범한다”며 반발하면서 보건·의료직능 간 갈등이 재점화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대한간호협회(간협)는 숙원이었던 간호법안 발의를 두고 “의사들의 집단 이기주의에 불안한 국민에게 의료 정상화의 희망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환영의 뜻을 밝혔다.
의사와 약사 단체는 간호사 업무 범위를 문제 삼아 즉각 간호법안 철회·수정을 요구하는 입장문을 냈다 대한의사협회(의협)는 “여야의 간호법안은 특정 직역의 권리와 이익만을 대변하는 간호사 특혜법”이라고 반발했다. 의협은 특히 “간호법안은 전문간호사의 무면허·불법 의료행위를 조장하고, 헌법상 포괄 위임 금지 원칙에 위배된다”며 “전문간호사와 간호사에게 현행 의료법 체계를 벗어난 무면허 의료 행위를 하게 하는, 국민 건강을 외면한 방안'이라고 주장했다.
의협은 “간호직역을 포함한 모든 보건의료 인력의 처우 개선이 필요한 것은 인지하고 있다”며 “소모적인 분쟁만 야기하는 간호법 논의를 중단하고, 보건의료 인력 모두의 처우 개선을 위해 국회와 정부가 나서라”고 했다.
대한약사회는 “보건의료인 각자의 면허 체계 안에는 독자적인 업무 범위가 있다”며 “국민의힘 법안은 간호사가 진료 지원 업무를 수행하는데 타 직능의 고유 업무에 해당하는 업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어 또다시 불필요한 논란을 야기하고 있다”고 했다. 약사회는 이어 “간호법은 간호 업무와 간호사 인력 지원을 위한 체계를 마련하기 위한 것인데 타 직능과의 갈등을 유발할 수 있는 조문이 들어가는 것은 입법 과정을 저해하는 일이 될 것”이라며 “간호사법의 제정 의도가 다시 한번 보건의료계의 직능 갈등으로 퇴색되지 않고 국민 건강을 위한 법률이 되기 위해 국회에서 세심하게 검토해 달라”고 촉구했다.
국회가 간호사법을 잇따라 재발의한 것은 의료현장을 떠난 전공의들의 공백을 PA간호사로 메우고 있는 현 상황과 연관이 있다. 의료법상 간호사 업무로 규정되지 않은 일들을 시범사업 형태로 허용하면서 1만2700여명에 달하는 전공의들 빈자리를 메우고 있는 현실을 고려해, 이를 아예 합법화하겠다는 것이다.
‘임상전담 간호사’로 불리는 PA 간호사들은 병원 요구에 따라 수술장 보조, 검사시술 보조, 응급상황 시 보조 등 위법과 탈법의 경계선상에서 전공의 역할을 일부 대신해왔다. 법안이 통과되면 법적으로 인정받는 간호사의 업무 범위가 더욱 명확해질 수 있다.
하지만 의료업계에선 PA 간호사가 직능 간 갈등을 유발해 보건의료업계의 혼란을 키울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시민단체 건강돌봄시민행동 등은 “현행 의료법·약사법·의료기사 등에 관한 법률과 상충해 대다수 직능과의 갈등을 초래할 것”이라는 입장이다. “의료기사 업무인 검사, 의사 업무인 진단, 약사 업무인 투약 등 면허 업무 침해를 허용했는데 어떤 직능이 보고만 있겠느냐”며 “이러한 입법은 직능 간 갈등을 부추겨 오히려 간호법 제정을 위한 정상적인 논의를 가로막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앞서 민주당이 지난해 2월 주도한 간호법은 윤석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폐기됐다. 간호법 제정 추진 과정에서 간협 등 간호계는 의사·간호조무사 등 13개 보건의료단체로 이뤄진 보건복지의료연대와 갈등을 빚은 결과다. 제정안에 담긴 ‘지역사회 간호’라는 표현이 문제가 됐는데, 간호사의 단독 개원을 가능하게 하고 간호조무사·응급구조사 등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게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번에 여야가 다시 발의한 간호법안에서는 ‘지역사회 간호’ 문구가 빠졌다.
정재영·조희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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