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경찰 "누가 강간 몇 번 했는지 골라내라"
검찰은 44명 중 10명만 기소…가해자 처벌 '0'
"성폭행 피해 대한 통념이 여전히 수사 개입"
"단순 지침 넘어 실제 이행 상황 점검해야"
[서울=뉴시스]임철휘 기자 = #1. 지난해 함께 술을 마시던 남성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해 경찰 신고를 한 A씨.
피해자의 명시적 동의 없는 강간 혐의 사건이었으나, 해당 수사관이 '폭행과 협박이 있었는지' 같은 좁은 의미의 강간 구성 요건을 물은 후 "무고죄로 처벌받을 수 있다"고 말하자 이에 겁먹은 A씨가 소 취하 의사를 밝혔다.
이후 사건은 지지부진하다가 가해자가 다른 여성에게 비슷한 범죄를 저질러 구속기소 되면서 마무리됐다.
#2. 지난해 전남 장흥의 한 마을에서는 남성 10여명이 50대 지적장애 여성을 상대로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경찰은 혐의가 입증된 피의자 1명을 제외한 10명에 대해서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불송치 결정을 내렸다.
B씨를 지원한 단체는 현행법상 장애인 학대 사건이 발생하면 수사기관이 이를 장애인 권익 옹호 기관에 알리고 장애인의 조력권을 보장해야 하지만, 그런 절차를 밟지 않았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사건은 '경찰이 2차 가해를 했다'는 비판과 함께 송치돼 검찰이 경찰에 보완 수사를 요구하는 것이 아닌 직접 수사 지휘를 하게 됐다.
위 두 사례 모두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시민감시단이 2023년 한 해 동안 공권력의 성폭력 수사와 재판 과정을 모니터링한 후 성폭력 피해자 인권 침해 사례로 꼽은 사건들이다. '밀양 성폭행 사건'이 재조명되고 당시 수사기관이 피해자에게 자행한 '2차 가해'가 도마에 오른 가운데, 이같은 수사기관의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가 적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밀양 성폭행 사건이 터진 2004년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이 사건 피해자 인권침해 직권조사 결과와 당시 밀양성폭력사건 대책위원회(대책위)가 낸 성명 등에 따르면, 경찰은 피해자 신상과 피해 사실을 언론에 누설했고 수사 과정에서 피해자를 모욕했다.
밀양 성폭행 사건을 수사하던 당시 울산 남부경찰서 소속 경찰관은 피해자를 향해 "네가 밀양 물을 다 흐려놨다"고 폭언했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마주 보게 하고는 "누가 강간을 몇 번 했는지 골라내라"고 하기도 했다.
경찰은 이같은 사실을 인정하면서 "담당자들을 인사 조처하고, 여성 경찰 조사관을 추가 배치하는 등 노력하겠다"고 사과했다.
그러나 당시 대책위는 공권력이 인권을 침해했다며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2007년 서울고법은 공권력의 인권 침해를 인정하고 국가가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5000만원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검찰도 피해자에게 "시끄럽게 해서 좋을 게 뭐 있느냐"며 피해자를 2차 가해했다. 가해자 44명 중 10명만 기소하고 20명은 소년부로 송치했다.
나머지 13명은 피해자 의사와 무관하게 친권자인 피해자의 부친과 합의했다는 이유로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했다.
법원은 기소된 10명이 피해자와 합의했거나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소년부 송치' 결정을 내렸다. 소년부로 보내진 30명 모두 전과가 남지 않는 소년보호처분을 받았으며, 결국 44명 중 형사 처벌을 받은 가해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전문가들은 과거보다는 개선됐으나 여전히 성폭력 피해에 대한 부정적인 통념이 수사 과정에 개입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최란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은 "성폭행 피해를 사소하게 여기는 수사관의 태도로 인해 피해자들이 어려움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며 "(수사관이)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결과를 예단할 때 피해자들은 우리 사회가 성폭력 피해를 부정적으로 여긴다는 걸 느끼고 좌절한다"고 전했다.
이어 "단순 2차 가해 방지를 위한 수사기관의 실무 지침들이 만들어지는 것을 넘어, 이것이 실제 현장에서 이행될 수 있도록 점검하는 체계가 갖춰져야 한다"면서 "피해를 겪은 사람으로서 (피해자들이) 가질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걸 (수사기관이) 인식할 수 있게 하는 교육도 중요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수사기관 역시 이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점에서 사회적으로 형성된 인식을 거스르는 건 어렵다. 우리 사회가 성폭력 피해에 대해 갖고 있는 통념을 점검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바뀔 수 있게 교육하는 활동들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임철휘 기자(fe@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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