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들 (루이 17세) -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차남으로 본명은 루이 샤를
본래 노르망디 공작이었다가 형인 왕세자 루이 조제프가 죽고 난 후 왕세자가 되었다.
프랑스 혁명 발발 후 가족들과 함께 감옥에 수감되었다.
어머니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재판 중에 어머니가 자신을 강간했다고 증언하는 바람에 마리 앙투아네트를 곤경에 몰아넣었다. 왜 루이 17세가 그런 증언을 했는지에 관해서 몇가지 설이 대두된 바 있는데 가장 신뢰할 만한 자료는 바로 루이 17세의 성격과 당시 정황.
마리 앙투아네트는 아들의 성격에 대해 '주변의 부추김이나 자신의 상상을 그대로 믿어버리는 경향이 있고,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 고집스러움을 지녔다'고 기록한 바 있는데, 그 또래의 남자아이들에게서 흔하게 나타나는 성격이다. 하지만 혁명기라는 특수한 시대에 이러한 성격이 마리 앙투아네트를 파멸로 몰아갔다.
재판 과정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사형을 선고할 만한 결정적인 물증이 없자 혁명가들은 가장 어린 루이 17세를 꼬드겨 근친상간을 했다고 말하게끔 했다. 전에 루이 17세가 빗자루를 타고 놀다가 고환에 상처를 입어서 어머니 마리 앙투아네트와 고모 엘리자베트 공주가 이 상처를 돌봐준 적이 있었다. 이러한 기억을 토대로 혁명가들은 루이 17세를 부추겨 어머니와 근친상간을 저질렀다고 말하도록 했는데, 성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7세의 남자아이였기에 이런 증언이 가능했을 것이다. 게다가 루이 17세는 당시 가족과 떨어져 감시원들에게 심하게 학대를 당해서 정신 상태가 결코 정상이 아니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아들의 그런 상황을 잘 알고 있기에 아들을 용서했지만, 누나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는 이 때 엄청난 충격을 받아 평생 남동생을 증오했고 남동생을 사칭하는 자들도 절대 만나지 않았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전기를 쓴 슈테판 츠바이크는 "어른들이 어린애의 감정을 건드려 애를 꼬셨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는데, 어느 정도 맞는 이야기인 셈이다.
물론 배심원들이 진심으로 이 말을 믿을 정도의 바보는 아니었겠지만, 결국 근친상간을 유죄로 인정하여 사형이 선고되었다. 사형시키기로 작정하고 벌인 날림 재판이기에 이게 증거가 된 것이고, 혁명 정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마리 앙투아네트를 처형할 증언을 만들어야만 했고, 루이 17세가 아니라 어떤 아이가 그 자리에 있었다 하더라도 그녀의 운명은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부모인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에서 사형당하고 난 후, 계속 탕플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다. 열악한 식사와 지저분한 감옥 환경으로 늘 병에 시달렸다가 고열에 의한 의식불명 상태로 빠져 사망했다. 죽기 전에 주정꾼 구두 수선쟁이 앙투안 시몬과 그의 아내에 의해 온갖 가혹행위를 당했다고 전해오지만, 정식 기록이 없어 입증되진 않았다.
루이는 1795년 6월 8일, 캄캄한 감옥에서 폐병에 걸려 1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루이의 시신을 검사한 검시관 필립-장 플르탕(Philippe-Jean Pelletan)은 루이가 영양실조로 뼈만 남아 있을 정도로 앙상하게 여위였다고 기록했다.
검시관은 루이의 몸에 채찍으로 맞은 상처자국이 많이 있어서 놀랐다고 말했다. 가슴, 등, 팔, 다리가 채찍 흉터 투성이었다고 기록했으며 검시관은 루이에 대해 동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루이를 해부하면서 왕족의 심장은 따로 보관한다는 관례를 생각하고 심장을 떼어내어 작은 항아리에 넣어 몰래 가지고 나왔다.
루이의 시신은 상트 마르게리트 섬에 있는 공동묘지에 아무런 표지도 없이 매장되었다. 루이 16세의 생존한 유일한 아들이자 프랑스의 1순위 왕위 계승권자였던 루이 17세의 쓸쓸한 최후였다.
- 딸 (마리 테레즈 공주) -
1778년 베르사유에서 태어났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1770년 결혼하여 7년 간이나 아이가 들어서지 않았기 때문에 임신은 대단한 경사였으나, 낳고 보니 딸이라서 주변에서는 매우 실망하였다. 그래도 그 동안 의심받던 루이 16세의 생식능력이 입증되었기 때문에 아무튼 프랑스 왕실로서는 경사스러운 일이었다.
'너는 나의 것'이라는 말 그대로 마리 앙투아네트는 마리 테레즈의 교육에 관심을 많이 쏟았다. 이는 시고모들, 즉 루이 15세의 딸들인 아델, 빅투아르, 소피가 거만하고 제멋대로 행동하여 사람들에게 경원당하는 것이 프랑스 왕실의 엄격하지 못한 교육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딸에게 동정심을 가르치기 위해서인지 빈민 계급이 사는 곳을 방문하거나, 빈민 계급의 아이들을 초대하여 그들에게 장난감을 선물하게 하는 등 인성 교육도 빠뜨리지 않았다. 1784년에는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불을 피울 장작도 없는 불행한 사람들이 너무 많은 탓에" 그들을 돕기 위해 돈을 다 써버려 딸에게 신년 선물을 주지 못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아직 어린 그녀에게는 이런 것들이 불만스러웠던 모양이다. 어머니가 말에서 떨어져 다쳤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덤덤하게 반응하자 어머니가 죽었을 수도 있다는 말에 "나는 어머니를 영원히 보고 싶지 않아요"라고 대답했을 정도. 반대로 루이 16세는 자식들에게 지나칠 정도로 너그러웠기 때문에, 마리 테레즈는 아버지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탕플 탑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겨우 11살에 아버지 루이 16세, 어머니 마리 앙투아네트, 고모 엘리자베트 공주가 차례로 처형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그리고 남동생 루이 17세는 병으로 죽어서 루이 16세의 직계 가족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가 된다.
그녀가 공주라 왕위를 계승할 수 없어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기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제대로 돌봐주지 않았기 때문에 대우는 매우 열악했다. 누더기를 입고 독방에 갇혀서 기약없는 몇 년 간을 보내게 된다.
마리 테레즈 자신도 자존심이 강해 혁명 정부의 심문에도 협조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남동생 루이 17세의 병을 걱정하여 국민공회에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감옥의 창문으로 가끔 루이 17세가 얻어맞고 지르는 비명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옥중에서 마리 테레즈는 가족에 대해서 어떠한 소식도 들을 수 없었고, 다만 아버지인 루이 16세가 사망했다는 소식만 접할 수 있었다. 이렇게 거의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고 2년 이상을 지내면서, 마리 테레즈는 이후 평생동안 이어지는 정신 장애를 가지게 되었다.
1795년쯤에는 공포 정치가 해소되면서 대우가 비교적 좋아졌다. 르네 샹테렌느 부인이 신변을 돌봐주도록 고용되었고, 마리 테레즈에게 의류, 필기 도구, 책 등을 제공했으며 정원을 산책하도록 허가를 받기도 했다. 르네 샹테렌느는 마리 테레즈가 불쌍하다고 생각하여 마리 앙투아네트 등 다른 가족들의 최후를 알려주었다. 진실을 알게 된 마리 테레즈는 비탄에 빠져 비명을 지르고 미친 듯이 울었다고 한다.
1795년, 혁명 정부는 오스트리아와 포로 교환 협상을 하면서 몇 명의 포로를 돌려받고 대신 마리 테레즈를 석방해서 오스트리아로 보낸다. 마리 테레즈가 풀려난 것은 17세 생일의 전날인 1795년 12월 18일이었다.
하지만 외가인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에서는 그녀를 썩 반갑게 여기지 않았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죽게 내버려두었다는 죄책감을 상기시키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외사촌인 프란츠 2세는 고모를 죽게 했다는 죄책감 탓인지 마리 테레즈에게 잘 대해주었다고 하며, 그녀를 자신의 동생 카를 대공과 결혼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어머니를 버린 외가가 아니라 친가인 부르봉 가문을 택했다. 만약 이 때 합스부르크 가문을 선택했다면 이후 그녀의 삶도 좀 더 편안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부르봉 가로 돌아간 것을 보면 어머니를 외면한 외가에 대한 분노가 아주 컸던 듯.
나폴레옹이 패배하고 루이 18세가 즉위하여 부르봉 왕가가 프랑스로 복귀하자 마리 테레즈는 고국으로 돌아왔다. 마리 테레즈는 루이 16세의 살아남은 하나뿐인 자식이었기 때문에 왕실에서 남녀를 불문하고 가장 높은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공주만 아니었다면 당장에라도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해도 지나칠 것이 없을 정도였으니.
어린 시절에는 밝은 성격의 여자아이였던 것으로 전해지지만 혁명 기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있는 고생 없는 고생을 다 하고 외국을 떠돌면서도 가증스러운 꼴만 보아서 그런지, 성년이 되어서는 매우 잔인하고 냉혹한 성격이 되었다. 온화하고 선량하며 동정심 많은 성격이었던 어머니 마리 앙투아네트와는 달리 샤를로트는 찢어지는 듯한 발작적인 신경질 히스테리를 부렸다고 한다.
민중들의 여론은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낸 공주에게 비교적 동정적이었다. 하지만 마리 테레즈의 입장에서는 민중들을 증오했다. 그녀는 평생 극렬한 왕당파 보수주의자로 살았으며, 혁명을 증오하고 백색 테러도 자주 일으켰다. 특히 나폴레옹을 병적인 수준으로 증오했는데, 나폴레옹 시대에 작위를 받은 귀족들을 귀족으로 취급하지 않고 평민처럼 불렀다고 한다.
나폴레옹이 축출된 뒤에 부르봉 왕가의 재건을 위하여 노력했지만 그 와중에 벌인 백색 테러로 민심을 잃고 결국 1830년 7월 혁명으로 프랑스에서 다시 쫓겨났다.
이후 영국, 이탈리아 등으로 떠돌면서 눈칫밥을 먹으면서 살아야 했고, 결국 어머니의 고국인 오스트리아에서 쓸쓸히 숨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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